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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휘석 시인 / 모멘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7.

류휘석 시인 / 모멘텀

 

 

과자를 흘리면 벌을 받는다 그렇게 자랐지 아빠가 죽어서 과자를 흘려

 

비스킷이 우르르 부서져내렸다 애인은 네모난 침대에 누워있고

 

나는 빗자루를 찾는다 애인에게 묻기도 했지 빗자루가 있을까?

빗자루는 없었고 대신 너는 코를 골았다 언제부터 우리는 편하게 등을 보이게 되었을까

 

나는 과자를 치우고 과자와 먹던 음료수를 치우고 휴지를 가져왔지

도무지 부스러기를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보고 있었다

대체로 둥글고, 그렇지만 원은 아닌

 

과자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더는 부서지지가 않아서

대신 죽은 아빠가 떠올랐지 잘 정돈된 책장에 누워 애인과 나와 부스러기를 지켜보는 눈

 

아빠는 화가 났을까?

나는 천천히 옷을 벗는다

 

애인을 깨우고 싶었는데 애인은 너무 따뜻해 보였어

나는 내 등을 만져보았지

 

잠깐 눈을 뜬 애인이 여전히 벽을 바라보면서

옆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편히 누워 자라고 이렇게 하얗고 깨끗한 집에서는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지겨운 꿈 지겨운 나체 지겨운 벽과 애인의 등

애인의 등에 아빠가 누워있다

 

애인은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지

다 안다 다 이해해 우리 아빠가 내 얼굴을 뭉개면서 펑펑 울던 것처럼

나는 사람을 잔혹하게 만들지 일그러지게 만들지

 

하얗고 깨끗한 집이 모서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반쯤 남은 집은 머리통처럼 둥글고 잔인한 모양

 

화장실에 들어간 애인이 나오지 않는다

 

 


 

 

류휘석 시인 /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고

 

 

앞서 걷던 네가 뒤돌아

“벌써 끝인가 봐. 개가 돌아오고 있어.”

말하면서 규칙은 시작된다

 

“가는 길에 비 피할 곳이 있을까요?”

지친 개를 안아든 주인이

흘러넘친 얼굴을 닦으며 말을 걸자

 

너는 개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네 손을 꼭 잡고

 

“글쎄요. 저희는 방금 막 시작해서요.”

 

목줄이 길게 바닥을 긁으며 저녁을 죄다 끌고 가는 동안

그 틈으로 모인 짙고 어두운 빗물이 우리들의 발목을 세게 말아 쥐는 동안에도

너는 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았는데

공원은 넘치려하고

 

나는 가만히 네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단단하게 직조된

가늘고 의미 없는 인간의 형상 같은 것을

 

“괜찮아?”

 

움켜쥔 사랑을 마구 휘두르면서

우리를 우리라고 함부로 부르는 것을

 

“미안. 잠깐 다른 생각했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여기가 끝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뻗어

공원의 안전표지판을 가리켰다

 

 


 

류휘석 시인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