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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세화 시인 / 사막의 뒷골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9.

강세화 시인 / 사막의 뒷골목

 

 

한때 나의 추억은

바다를 건너서 사막을 빠져나왔다.

악몽 같은 항해 끝에

'조니 워커'의 숙취에 풀려난 것은 다행이었다.

얼마나 취해 있었던지

파도 거품이 솜사탕으로 보였다.

 

학교에서 처음 열린 운동회 때

꼴찌로 달렸던 기억이 남아서

다시는 경주에 나가지 않았다.

지는 것이 싫은 내색도 못 하고

차 시간에 늦어도 일부러 뛰지 않았다.

조바심 나는 성깔을 감추고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바늘을 꽃으면서

 

바다는 사막이었다.

목구멍이 붓도록 술을 마시고

핏발 선 눈으로 바다와 아침과 해를

굴렁쇠 굴리는 나날이

도시의 뒷골목에서처럼

거기서도 뒷길로 내몰렸다.

꿈을 안고 뛰어든 바다였는데

선상 생활이 모래처럼 삭막하였다.

그렇게 지나온 날이 또한

한때 나의 풍경이 되었다.

 

 


 

 

강세화 시인 / 봄

 

 

군시럽게 몸이

근실거리는 때가 되었다.

 

노란 꽃이

입을 비죽거리고

 

개구리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여기저기 표나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그런 태를

살피는 때가 되었다.

 

 


 

강세화 시인

1951년 울산에서 출생. 1983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수상, 1986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손톱 혹은 속눈썹 하나>, <수상한 낌새> 등. 창릉문학상. 동일 문학상 등. 제4회 오영수문학상(창작기금)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