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경 시인 / 마지막 거처
거처를 다시 마련한다면 하동 평사리쯤이면 어떤가
해와 별과 달이 내리쬐는 평사(平沙)에선 모국어가 점점 더 따뜻해질 것만 같아서
무엇을 새로 쓰기보다는 있는 것을 어디에 이어 붙여도 낯설지 않게 스며들 것만 같아서
뒤쪽부터 읽어도 좋은 책처럼 늦은 인연도 잘 넘어가는 페이지
저녁 마당엔 밀린 이야기가 촘촘히 돋아나서 그 많은 이야기 다 들어주고 싶은 얼굴로 손 뻗어 별빛 보석 하나씩 따주는 시늉하면 원수도 사랑할 것만 같은 밤이 오겠지
며칠 비가 와 눅눅한 날들이 이어지면 눈가의 습기를 닦아주기에 좋은 곳을 생각의 끝 소실점으로 기우는 곳을 눈 감고 더 멀리 바라본다.
나혜경 시인 / 게으른 세잔
엑상프로방스 애플 매장 앞엔 우연처럼 화구를 맨 세잔이 우뚝 서 있지 카페 빨강에서 세잔이 얼마나 게을렀는가를 들었어 다 살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던 화가들의 삶처럼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는 사과 굴리지 않아도 굴러가는 삶처럼 정물 밖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사과를 만드느라 바라보는 데서 더 오랜 시간을 들였다지 이브의 사과가 뉴턴의 사과가 되고 뉴턴의 사과는 세잔의 사과가 되고 세잔의 사과가 잡스의 애플이 되는 동안 새콤달콤한 사과를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하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사과, 애플 애플은 이제 오래 바라보아도 시들지 않고 시들기 전에 완성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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