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연 시인 / 나도바람꽃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 울고 있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태초의 울음인 듯 세상 마지막 울음인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나 여기 있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름을 흩뿌리고 있다
눈물 속에 무지개가 걸렸다
내 어릴 적 모습 같아 우는 이유를 차마 묻지 못했다
서정연 시인 / 그, 칼
모퉁이를 돌아서 길에서 주웠지 그, 칼 빨간 사과 껍질을 깎으면 좋을 그, 칼 손잡이도 빨갛고 칼집도 빨간 그, 칼을 주웠지
칼집에 얌전히 꽂혀 있는 새털처럼 가볍고 은은한 칼날이 마음에 들었지 흠집도 없이ㅣ 말끔한 그, 칼 향기 나는 사과를 깎으려고 몰래 가방에 넣었지
그때였어 등 뒤에서 그림자 밀치는 소리 얼굴 가슴 배 무릎이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업고 어두어지는 소리
번쩍이는 공포 그러나 결코 어두어지지 않는 공포에 나는 눈을 떴지
향긋한 사과나 깎으면 좋을 그, 칼이 나를 불렀지 나를 깨웠지
물먹은 한지의 울먹임처럼 그 낯설고, 지독한 떨림을 안고 따끈한 저녁 불빛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달렸지
빨간 사과나 깎으면 좋을 아름다운 그, 칼 그, 칼을 품고 밤새 신열을 앓았지
- <시인동네> 2018년 6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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