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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나도바람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5.

서정연 시인 / 나도바람꽃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

울고 있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태초의 울음인 듯

세상 마지막 울음인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나 여기 있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름을

흩뿌리고 있다

 

눈물 속에

무지개가 걸렸다

 

내 어릴 적 모습 같아

우는 이유를

차마 묻지 못했다

 

 


 

 

서정연 시인 / 그, 칼

 

 

모퉁이를 돌아서

길에서 주웠지 그, 칼

빨간 사과 껍질을 깎으면 좋을 그, 칼

손잡이도 빨갛고 칼집도 빨간

그, 칼을 주웠지

 

칼집에 얌전히 꽂혀 있는

새털처럼 가볍고 은은한 칼날이 마음에 들었지

흠집도 없이ㅣ 말끔한 그, 칼

향기 나는 사과를 깎으려고

몰래 가방에 넣었지

 

그때였어

등 뒤에서 그림자 밀치는 소리

얼굴 가슴 배 무릎이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업고

어두어지는 소리

 

번쩍이는 공포

그러나 결코 어두어지지 않는 공포에 나는 눈을 떴지

 

향긋한 사과나 깎으면 좋을

그, 칼이 나를 불렀지

나를 깨웠지

 

물먹은 한지의 울먹임처럼

그 낯설고, 지독한 떨림을 안고

따끈한 저녁 불빛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달렸지

 

빨간 사과나 깎으면 좋을 아름다운 그, 칼

그, 칼을 품고

밤새 신열을 앓았지

 

- <시인동네> 2018년 6월호 -

 

 


 

서정연 시인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