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그리기
끙끙 앓는 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저 여자 죽을 만큼 아파보면 삶이 가벼워지기도 한다는 저 여자 마음 아픈 날에는 시집을 덮고 돌아눕는 저 여자 눈물 나는 날은 가까이 보이기도 하는 저 여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해서 저 여자
허공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저 여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껍질을 벗겨 여자를 발굴하는 작업
아직, 무엇이 더 남았냐고 내게 묻는 저 여자 아디로 달려 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 천년 주저앉으려는 것일까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외면하고 싶은 저 여자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김명옥 시인(화가) / 하얀 코끼리 눈 속에 별은 뜨고
암각화 속에 웅크리고 있던 코끼리가 걸어 나온다 무우수無憂樹가 가부좌를 풀던 참이었다 어느 행성에서 왔을까 연꽃을 손에 꼭 쥔 진흙 인형과 황금 나팔 입에 문 아이가 코끼리 등에 올랐다 손금 속에 수많은 길들 무작정 걸었었지 근심의 돌탑 돌고 돌아 무엇을 보았나 명치끝에 걸린 타클라마칸 한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곳 더딘 걸음이나마 뒤따라 가볼까 낯선 곳에 첫발을 디디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만날 수 있을까 하얀 코끼리 눈 속에 별은 뜨고 긴 손가락이 부끄러워 장갑을 끼려던 참이었다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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