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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그리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6.

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그리기

 

 

끙끙 앓는 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저 여자

죽을 만큼 아파보면

삶이 가벼워지기도 한다는 저 여자

마음 아픈 날에는 시집을 덮고 돌아눕는 저 여자

눈물 나는 날은 가까이 보이기도 하는 저 여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해서 저 여자

 

허공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저 여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껍질을 벗겨

여자를 발굴하는 작업

 

아직, 무엇이 더 남았냐고 내게 묻는 저 여자

아디로

달려 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 천년 주저앉으려는 것일까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외면하고 싶은 저 여자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김명옥 시인(화가) / 하얀 코끼리 눈 속에 별은 뜨고

 

 

암각화 속에 웅크리고 있던 코끼리가 걸어 나온다

무우수無憂樹가 가부좌를 풀던 참이었다

어느 행성에서 왔을까

연꽃을 손에 꼭 쥔 진흙 인형과

황금 나팔 입에 문 아이가 코끼리 등에 올랐다

손금 속에 수많은 길들 무작정 걸었었지

근심의 돌탑 돌고 돌아 무엇을 보았나

명치끝에 걸린 타클라마칸

한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곳

더딘 걸음이나마 뒤따라 가볼까

낯선 곳에 첫발을 디디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만날 수 있을까

하얀 코끼리 눈 속에 별은 뜨고

긴 손가락이 부끄러워 장갑을 끼려던 참이었다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김명옥 시인(화가)

2015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서양화가.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