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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혜 시인 / 문신2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7.

이성혜 시인 / 문신2

-앙티브의 탑들(Paul Signac 1863~1935)

 

 

나가고 싶어도 소용없어요, 갯내 나는 바람에 얼굴을 헹구고

번다한 인파 속에 숨어들고 싶어도 점의 집합체에 갇혀

움직일 수 없어요

 

당신이 치열하게 내게로 향하던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요트를 타고 바다를 맴돌다 오는 당신 망막에는

태양의 수천가지 체위와 수만의 바람이 투명한 나무처럼일렁였지요

난 나무에 걸린 바람처럼 고요했어요

짧게, 길게, 가볍게, 혹은 힘을 주며 수평과 수직으로 마음껏

만지도록 온몸을 맡겼지요

그는 격하거나 세심하거나 그어지는 선을 사용하지 않아요

잘게잘게 부서지는 수천수만의 일렁임으로 전신을 채우지요

 

통각의 눈을 뜨고 흥건하게 지나가는 길들을 읽어봐요

핑크와 노랑으로 빛나는 성벽이 서고 가루프 등대가 세워졌네요

물결에 흔들리는 배 두 척과 무염시대 교회종탑, 그리말디성과

나지막한 건물들이 밝은 빛 속에서 손 흔들고 있어요

 

태양은 체위에 따라 빛과 물감과 점들이 섞인다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햇살에 온몸이 흔들리고 부서지는데……

 

 


 

 

이성혜 시인 / 가족은 각각의 상황을 산다

 

 

저무는 강의 뒷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통째로 붉음을 먹어 살아나는 어둠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가 소파에 몸을 던진다

지느러미에서 노곤한 평화와 비린내가 읽힌다

장강의 뒷물결에 밀리는 앞물결

헐거워진 지느러미가 안쓰러워 살가움 하나 던진다

당신보다 일주일 더 살아서 꼭꼭 묻어주고 갈게~

 

두 분은 좋겠지만 일주일에 두 번 큰일 치르는 전, 얼마나 힘들겠어요?

속빈 파프리카 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노랗게

모처럼 눌린 대화가 보송보송 살아나는 자리에

청출어람도 아닌 뒷물결이…!

뒤를 견제하려는 순간, 순하게 밀려가는 흰 갈기가 보였다

 

가족이란, 한 물결에 각각의 상황을 쓰며 밀고가는 강물 기록부 같은 거다

 

 


 

이성혜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국문학사. 2010년 계간 《시와 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