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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이삭 시인 / 소나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8.

안이삭 시인 / 소나기

 

 

걸어서 바다에 닿는 일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입니다

 

강의 길이만큼 실을 풀었다가

다시 강의 길이만큼 되감았으므로

결국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수히 풀었다가 감기를 반복하면서

보풀이 일듯 켜켜이 저장되는 기억들

봄까치꽃 피었다 지고

노랑붓꽃 피었다 지고

하늘말나리 피었다 지고

부용화 피었다 뚝뚝 떨어지고

모두 피었다가 졌으므로 남은 것은 없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뱀이 하얗게 말라 죽어 있기도 했지만

그 또한 곧 사라졌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또 자라난 발톱을 깎았습니다

갑자기 거칠게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아직 남은 얼룩들이 말끔히 지워지겠습니다

어릴 때라면 서둘러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리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겠지만

이제 젖은들 어떻겠습니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젖겠습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걷는 일이

매미가 우는 울음의 길이나

잠자리가 날 수 있는 하늘의 높이에

티끌만큼이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부디 용서하십시오

 

—시집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2014)에서

 

 


 

 

안이삭 시인 / 각종 구름을 팝니다

 

 

그 가게

나도 가본 적 있다

멕시코 모자 타고 태평양 건너는 꿈을 꾼 날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

'멕시코모자구름주세요'

 

그는 마법사였다

겨우 혼자 앉을 만큼 작은 가게에서

수천가지 구름을 관리하고 있었다

미친 여자가 와서 시간구름을 달라고 했을 때

딱 한번 이맛살을 찌푸린 것 말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님이 원하는 구름을 내어주었다

그마저 아무도 몰래

더 위대한 마법사의 주소를 자세하게 일러주었다는 후문이다

내 앞의 여자는 대용량 밥솥구름을 원했고

그 앞의 남자는 빨간색 넥타이구름을 사갔다

 

포장지 안에

자기가 원하는 구름이 들어있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구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멕시코 모자구름을 손에 넣는 순간

멕시코 모자 타고 태평양 건너

남미의 뜨거운 먼지바람에 휩싸인 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당연한 증상이다

얇은 포장지 안쪽에서

쉬지 않고 뭉쳤다가 풀어지는 구름의 움직임은 너무 뜨거워서

가끔 지울 수없는 화상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구름이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

 

포장지를 뜯고 구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붙드는 일은

마법사의 책임이 아니다

어쩌다가 운 좋은 사람은

구름이 흩어지기 전에 붙잡기도 했다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뒷일에 대해서는

소문으로조차 들리지 않는다

 

종로3가 지하도 계단 끝

오늘도 마법사는 주름 깊은 얼굴로

구름이 빠져나간 뒤 버려진 포장지들을 쓸어 담는다

 

 


 

안이삭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 《애지》 여름호에 <초록방울제사장>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