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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명윤 시인 / 조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9.

이명윤 시인 / 조화

 

 

이화공원묘지에 도착하니

기억은 비로소 선명한 색채를 띤다

고왔던 당신,

묘비 옆 화병에 오색 이미지로 피어있다

계절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공손한지

작년 가을에 뿌린 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울며불며한 날들은 어느새 잎이 지고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있는 시간,

우리는 일렬로 서서

조화를 새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도중에

어린 조카가 한쪽으로 치워둔 꽃을 만지작거린다

죽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한 거다

세월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부릅뜬 웃음을 본다

우리는 모처럼 만났지만 습관처럼 갈 길이 바빴다

서로의 표정에 대해

몇 마디 안부를 던지고 떠나는 길

도로 건너편 허리 굽은 노파가

죽음 한 송이를 오천 원에 팔고 있다

차창 너머로

마주친 마른과메기의 눈빛

삶이 죽음을 한 아름 안고 있다

한 줄의 문장이 까마귀처럼 펄럭이며

백미러를 따라온다

살다가 문득

삶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한 순간이 있다

그런 날은 온통

흑백으로 흐릿해지는 세상의 이마를

만지작만지작거리고 싶은 것이다

 

 


 

 

이명윤 시인 /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 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는 말이다

진짜 배고프다는 뜻이다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에서

 

 


 

이명윤 시인

1968년 통영에서 출생. 2007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화기 속의 여자』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이 있음. 2006년 전태일문학상. 현재 통영시청에서 집필 업무를 맡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