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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하선 시인 / 향기에도 지문이 있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2.

지하선 시인 / 향기에도 지문이 있다

 

유년의 허기진 기억을 비집고 들어서네

할머니 손맛 그윽한 쑥개떡

할머니 가슴으로 빚어내는 초록 달 이었네

아늑하니 살내음 고여 있는 탯줄의 고향이었네

손끝으로 더듬어가는 먼먼 날의 푸르고 은은한 향기

한 입 베어 물면 달빛 한 점씩 씹혔네

붉은 입술엔 달빛 지문 묻어나고

입속에선 지문이 부서지는 소리

할머니 한숨이 자정을 빠져나가고 있었네

아픔과 고통이 어둠을 통과 하며

내게로 전해지는 비릿한 DNA

주름진 그늘 사이사이로

할머니의 지문이 뭉개지도록

수없이 입맞춤하던 내 어린 입들도

나를 키운 향기로 자라갔네

 

 


 

 

지하선 시인 / 그 잠의 스위치1

밤의 이마 한가운데 박힌 달의 눈꺼풀

우주 기호 나열된 잠의 버튼 꾹꾹 누른다

 

​태초의 침묵 그 너머에서 날아온 마른번개 한줄기

길을 밝혔지만

주파수 어긋난 은하 한 자락 문틈에 끼이고

별빛의 갈피마다 바람살 맞은 신음

시간의 통점을 찌른다

 

​자정의 실핏줄 속에서 꿈틀거리는 새벽

초침에서 떨어지는 적막을 뒤척이는데

 

​벌겋게 충혈된 잠의 문틈으로

달그림자 얼비친 꿈의 쭉정이 푸루룩 빠져나온다

 

​새로 돋는 갓밝이 어둠을 쪼아 먹는 날갯짓 부산하다.

 

-시집 『그 잠의 스위치』 2021.미네르바

 

 


 

지하선 시인

2004년 《수필춘추》로 수필 등단. 2008년 《미네르바》 신인상 시 등단. 시집으로 『소리를 키우는 침묵』,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 『잠을 굽다』 『그 잠의 스위치』가 있음.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지원, 도서관,「내 생애 첫 작가수업」 선정 문학작가 창작기금수혜.  현재 성동문인협회 회장, 미네르바 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서울지부 이사, 개포도서관 문예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