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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곡 시인 / 수도원 종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4.

이병곡 시인 / 수도원 종소리

공황장애를 심하게 앓던

이십 대 중반에 나는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수도원의 종지기가 되고 싶었다

 

베네딕도 수도원에 가서

종탑을 올려다보며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줄에 매달려 살고 싶었다

 

종을 치는 일보다

때로는 종소리가 되어

연민의 시선에서 벗어나

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이 감성적인 바람만으로

수도원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이젠 어느 수도원 밖에서

그 소망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봉쇄 수도원에는

아침 7시만 되면

늙은 수녀님 한 분이

긴 줄에 매달려 종을 연주한다

 

가끔 문 안을 기웃거리는 내게

아직은 종지기를 물려주지 않을 듯

오늘은 슈베르트 내일은 구노의

노을에 물든 아베마리아를 들려준다

 

 


 

 

이병곡 시인 / 내 인생이 한 편의 시가 되면 좋겠다

 

 

내가 어릴 때 꿈꾸던 아름다운 인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지만

수많은 끝을 이어가며 걸어온

아득한 저 길 위의 시간 그대로

내 인생이 한 편의 시가 되면 좋겠다

내게는 다행히 몇 개의 아름다운 일이 있었고

이것은 끊어진 문장을 잇는 다리가 된다

내가 포기를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게 보내준 따뜻한 눈길과

좋은 말로 위로해 준 것은

그들의 겸손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시에서 이런 온유함이 빠져서는 안 된다

나는 누군가의 슬픔을

내 기쁨으로 가져온 적도 있었다

심지어 나는 하느님이 아끼는 가난의 정의를

어디서 잊어버렸는지 이제 기억조차 없다

시가 고백의 언어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아직도 철학의 빈곤 때문에 부끄럽다

실패와 아픔이 내 삶에서 얼마나 위대했는지 모른다

부끄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다

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명한 시인들이 차지할 몫이다

내게는 그분들이 버린 가장 거친 언어 몇 줄이면 된다

나는 결국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시를 쓰면 안 된다

세상은 더 이상 내가 쓴 시를 믿지 않는다

내가 시인이 되는 것보다

내 인생이 시가 되면 좋겠다

 

 


 

이병곡 시인

1955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계간 《시평》 신인상을 통해 등단. 밀양시청 도시과장으로 40여 년의 공직생활. 시집 <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망새>. 현재 밀양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