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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윤 시인 / 항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8.

임윤 시인 / 항로

 

 

통조림용 빈 깡통 싣고 동해를 헤엄쳐

달포 만에 코르사코프 항에 닿은 화물선

낯설지 않은 파도의 손짓

굴곡진 파랑의 연대기도 기억 할

항로의 힘줄 단단히 움켜잡는다

귀신고래 울음이 가늘게 들려오는 바다

밤의 채도에 차곡차곡 눌려 깊이를 줄여본다

비닐 랩으로 친친 감긴 빈 깡통들

겉면에 그려진 연어들이 불빛에 파닥인다

자작나무 즐비한 아무르강 건너

모스크바로 이어질 시베리아 횡단철도

또다시 낯선 길 떠나야 할 연어들

파렛트 이고 진 트레일러가

행렬 이루어 사할린스크로 떠난 뒤

텅 빈 갑판위에 갈매기 울음이 쌓인다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

접었던 지느러미 펼쳐 출항준비 마치고

징용세대 노인들은 영구귀국을 서두른다

강을 떠났다 강으로 돌아오고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 갈 연어들

수평선 너머 가쁜 숨들이 꿈틀거린다

 

 


 

 

임윤 시인 / 피리 속으로 사라지다

 

 

 이란 소금동굴에서 발견된 천오백년 전 사내, 일그러진 해골 일곱 구멍엔 꼬물거리는 바람이 틀어 앉았다네 단숨에 빠져나온 공기가 음계의 시작이었다지 퇴적층이 그어놓은 오선지 위론 암염의 음표들이 반짝거렸다더군 비음 흥얼거리던 구멍마다 잃어버린 시간들로 넘쳐났겠지 사막으로 내통한 이음매가 풀리자 비단길에도 피리 소리 흩날렸다 하네 별들은 굽이치던 선율 따라 사구 너머로 곤두박질쳤다나? 그 소리에 놀란 쌍봉낙타 숨구멍이 뻥 뚫렸다더군 신기루를 그려낸 바람의 손가락, 곡선에 걸린 피리 소리는 그의 비명이었다 하네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에서

 

 


 

 

임윤 시인 / 여름은 가늘다

 

 

허공으로 쑥쑥 내민 손

 

낭창낭창 가는 허리

 

철새들이 남쪽 향해 깃털 고르면

 

사할린의 풀들은 마음이 바빠진다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 실천문학사, 2011

 

 


 

임윤 시인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고, 울산에서 성장. 울산대학교 졸업, 1990년대 연어사업으로 러시아 사할린과 쿠릴열도, 중국 등지를 10여 년간 주유하였다. 2007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 2011)과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푸른사상, 2015)가 있음.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