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섭 시인 / 겨울나무
한여름 들끓어 올랐던
세상과의 불화를 잠재우고
홀가분한 몸뚱이로 봄을 기다리는 그대
고영섭 시인 / 멸치
자기를 던져본 이들만이 안다 해저산맥 사이를 자맥질하며 아무 시름없이 노닐던 때에는 삶의 참맛 몰랐으나 삶이 이렇게 저어가듯 그저 가볍다는 것만 알았을 뿐 어쩌다 하늘이 너무나 그리워 물 위로 고개를 내밀다 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갑판 어디메쯤에서 말려져버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내 초라한 모습 그러나 자기를 버려본 이들만이 안다 후라이팬 위에서 콩기름에 버무려 달달 볶이거나 마른 안주가 되어 고추장에 찍혀 먹히거나 다시마와 함께 맹물에 익혀가며 다싯물이 되거나 믹서기에 갈려 알지 못하는 국물에 던져질 때에 비로소 삶의 참맛을 알게 된다 나를 버려서 다른 음식맛을 돋궈주는 감초같은 존재를 나를 던져서 남을 구하는 이타적 존재를 본디부터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에사 나의 실체 아닌 실체를 보았다
고영섭 시인 / 명태 - 국민생선
지구가 서서히 더워지자 찬 바닷물결을 찾아 북태평양에서 베링해를 넘나들던 명태 한 마리 강원도 바닷가 한 어부의 그물에 걸려 체념한 채 지난 몇 몇 전생에서 불렸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보며 제 업식業識을 회상해 보고 있다 처음으로 원양어선에 잡혀 불렸던 원양태 그 이듬해 근해에서 잡혀 불렸던 지방태 그 이듬해 봄에 잡혀 불렸던 춘태 그 이듬해 가을에 잡혀 불렸던 추태 그 이듬해 겨울에 잡혀 불렸던 동태 그 이듬해 갓 잡혀 불렸던 생태 그 이듬해 얼려 불렸던 동태 그 이듬해에 말려 붙여진 북어 혹은 건태 그 이듬해 꾸들꾸들하게 반쯤 말려 붙여진 코다리 그 이듬해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당해 노랗게 말려 붙여진 황태 그 이듬해 잘 말려진 황태처럼 결이 부드럽고 스펀지처럼 보슬보슬해 붙여진 더덕북어 재작년에 강원도에서 잡혀 붙여진 강태 작년에 낚시로 잡혀 붙여진 조태 오늘 그물로 잡혀 붙여진 망태 이 모든 이름들을 그는 지금 여기에서 생각해 본다 아! 나는 이곳에 너무 자주 태어났구나 이곳에 거듭 거듭 태어나며 얻어 들은 하고 많은 내 별명들! 제사상에까지 빠지지 않고 오르내린다 하여 국민들이 붙여준 국민생선이란 이름! 나는 아직도 이 허명虛名들에 속아 이 깊은 고통의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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