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심 시인 / 고해성사
당신은 내게 너무도 잘 속아 주었다 제대로 속아 주려고 했던 단단히 속아 넘어간 사람처럼 당신이 결국은 나를 속였다
어두운 기도실에 엎드려 두 손을 촛불처럼 모아 쥐고 간구했다
겨우 손가락으로 당신의 얼굴을 읽었듯이 마음으로 더듬거려 당신을 새겨 넣었듯이 앞 못 보는 자, 이렇게 자신의 얼굴도 읽지 못해 얼굴을 읽혀 버렸다 더듬더듬 나아갔다 당신이 나를 속였듯이 내가 나를 속였듯이 그렇게 벽에 붙은 스위치를 지나친다 지금은 환하게 불 켤 수 없다 아직도 내가 너무 어둡다
이진심 시인 / 자궁 외 임신
마취가 덜 깬 탓일까 철제침대는 삐끄덕삐끄덕 신음소리를 내고 물 위에 붉은 꽃잎들처럼 커튼의 그림자 이 방 천장을 흘러다닌다
자궁의 문이 너무 단단하게 닫혀 있어 왼쪽 나팔관, 그 벗어난 길 위에 집을 지어버린 것일까 이제 내 몸은 폐광이다 괴어 놓은 버팀목들은 툭툭 분질러졌다 정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서서히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침대는 연못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꿀꺽 나를 먹어 버린다 여기 연못에 누웠던 여자들의 삐끄덕삐끄덕 신음소리가 나를 가라 앉힌다
-시집 <맛있는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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