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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이 시인 / 자낙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30.

김도이 시인 / 자낙스

 

 

불면의 구두를 신고 밤이 걸어온다

 어둠의 부스러기들을 가루약처럼 흩날리면서 껐다 켰다를 반복할 때마다 복제되는 패닉 근육이 빠져나가는 감정들 조금씩 깊어지고 다시 옅어지는 어둠의 모습을 재난처럼 바라봤다 꿈은 아무도 꿀 수 없었는데 달빛은 발작처럼 쏟아진다

 자신이 버리고 온 그림자가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믿는 너는 환기가 안 되는 골방에서 말을 잃었다 물기 없이 말라가는 지독한 가뭄에 시원한 물줄기를 언어로 뭉친 알약이 필요했다 밤을 새운 아침이 침대 밑을 들추면 삼키지 못한 긴장들이 불안처럼 빼곡히 앉아있었다

 문을 열어 봐

 농담이 필요해

 깨물거나 으깨거나 부수지 말고

 시시하고 껄렁하고 허무맹랑한

 진지한 세계는 우리의 병명이었다

 나쁜 기억의 벽속에는 거두지 못한 내 그림자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까봐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다 잠들지 못하는 건 나인데 유리병에 든 치사량을 삼키는 건 언제나 너였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 깨물어지고 으깨어지고 부수어졌는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거야

* 자낙스 : 항불안제의 일종

​​

―열린시학회 동인지 『산책할 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김도이 시인 / 달바다*

 

 당신과 나 사이엔 이제 계단이 없다 공중이 발판이다

 이것은 다만 달의 일이고 몰락하는 층간의 마음

 

 등 뒤의 객석은 어두운 시의 행간처럼 텅 빈 밤인데

 취한 듯

 붉은 저녁달이 해변을 파먹고

 비관주의자인 당신은 내가 달바다로 돌아갔다고 믿는다

 뒤돌아 앉은 썰물 앞에, 바다와 몸 한 번 섞지 못해 불임이 된 울 모래가 등 떠밀어 보내라고 가서 다시는 내 저문 세상에 돌아오지 말라고 목 놓아 통곡하는 삭망의 바닷가

 

 엎어진 여배우가 감정을 연기하지만

 슬픔이란 걸 내보이지 못해 박수도 없이 점점 기울어지는데

 오래전 사산된 태아처럼 비장미 가득한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달의 뒤편으로 막이 오른다

*달 표면에 있는 어두운 지역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김도이 시인 / 유리창의 조건

 

 

 우리가 보는 창밖은 실재일까

 풍경에 자꾸 속았다

 

 창가에 놓인 이젤 위에 풍경이 얹혀 있다 밖은 안을 엿보려 하고 창문은 그림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잘 보려면 마음으로, 유리창처럼 당신이 투명했을 때,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눈앞엔 복제만 수두룩했다

 

 창밖은 실제 하지만 속임수가 많아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잘 볼 수있도록 나는 오랫동안 걸려 있었지만 액자 바깥은 볼 수 없어,

 

 밖은 거짓을 감추느라 최선을 다해 진실이다

 

 너는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창문들이 자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어서

 길게 골몰하는 것은 나를 깨뜨릴 수가 있어

 

 투명한 당신을 던지고 풍경이 달아난 액자를 떠올리며 그림 속 그림으로 남는다

 

-시집 『장미를 수선해 주세요」 (시작, 2022.09)

 

 


 

 

김도이 시인 / 유주얼 서스펙트*

 

 쓸모없이 짖어대는 그것을 내다 버리기로 했다

 분실과 유기의 차이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물증을 삼켰다가 심증을 뱉으면서

 배후처럼 우연의 정원에는 의심이 자라났다

 버리셨나 봐요

 결혼반지처럼

 분실했다고 우겼다

 

 서사가 들어갈 틈이 없는 게 서사였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법까지 배운 엘리트, 단서는 없었지만 차고 넘치는 알리바이가 죄를 키우고 어떤 죄명들은 씨앗도 없이 꽃을 피웠다

 

 창문이 없는 감방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을 가장한 추궁이 들락거렸다

 

 긴 숨은 진술 앞에 무용하지만 때로 우연은 너무 작위적이어서 이런 우연이 싫어요거짓말탐지기를 해봐요 우리, 잠복기가 길었으면 서사가 달랐을까 내가 그 범죄의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증거가 없으니

 

 버려진 줄 모르게

 자백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또는 그녀는

 나 없이도 잘 산다

*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르는 사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0월호 발표​

 

 


 

 

김도이 시인 / 인생을 그리다

 

 

 시인은 펜으로, 가수는 입으로,

 화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세상이란 숲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절벽에서 갈라지는 빙폭의 반란으로 삽시간에 생을 덫칠하며 산다

 

 지상의 모든 것은 그림이다

 생도 그림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리는 외로운 그림이다

 

 어느 때는 협곡을 넘나들며

 또 어느 때는 주린창자를 메워가며 그려야 하는 그림 아닌 생존이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붓과

 장엄한 물감으로 그린 명화다

 

 그것은 걸작이고 나는 졸작이다

 그것은 명작이고 나는 위작이다

 

 너란 명화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명화 한 편을 남겨보려고 목숨을 거는 일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커다란 낭비요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은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아니한 영원한 명작이다.

 명작을 탐하고져 허우적 거림의 연속이다.  

 

 


 

 

김도이 시인 / 신경증 피는 화원

 바이러스도 우기라면서 그 불안을 홀짝이며 두 계절이나 말아먹었다

 그늘진 화원엔 불온한 이파리들만 돋아 물관을 타고 오르내릴 수 없어 소화불량에 걸린 꽃들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웃는 법을 잊었는데, 나는 불안으로 병든 꽃들을 죽일 수 없어 입막음으로 달래야 고요를 잃은 내 심장은 때도 없이 두근두근 경고음을 울려 댔고 걱정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는 울증인 빗소리, 출구는 한참이나 멀고 소문은 곁가지로 뻗어 나가 푸른 물줄기와 춤추는 햇살의 식사는 이제 제공되지 않아요

 문안에서 극심한 감정 교차 중인 장미는 장마의 수척한 눈으로 빨강인지 분홍인지 알 수 없는 빛깔만 피고 있는, 감상은 금물이라며 띄엄띄엄 말을 걸어오던 실성한 화원의 문에 돌림병이 옮겨 앉았는지 시름시름 분절된 말들만 쏟아 내고 있다

 

-시집 『장미를 수선해 주세요』 중에서

 

 


 

김도이 시인

서울에서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2014년 《열린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얼룩의 시차』 『장미를 수선해 주세요』. 2016년 제3회 홍완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