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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태 시인 / 술빵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4.

김종태 시인 / 술빵

 

 

버스 정류장 옆에 빨간 다라이 가득

엇구수한 옥수수 내에 정신 번쩍 들었습니다

누렇게 부풀어오른 술빵을 보았던 겁니다

1,000원에 하나짜리 덥석 베어 무니

누가 뒤통수를 만지는 듯 대낮이 훤합니다

나머지 쑤셔 넣은 가방 사이로 퍼져나는 막걸리 냄새

술로 빵을 만든 건지 빵으로 술을 빚은 건지

한잔 술도 못 이기는 가련한 서른 세 살입니다

그 옛날 똥돼지 몰고 장에 나온 어머니 손잡고

또 한 손엔 술빵 쥐고 거닐던 김천 우시장

황소 등때기엔 여린 눈발이 오늘처럼

푸시시 햇살 속으로 흩날렸습니다

 

속에 박힌 검은콩이 건포도로 바뀌었어도

언제나 그렇고 그런 맛과 향

낮술에 취한 채 얼큰한 술국은

울렁거리는 마음 여기저기로

술술 새 나가고 있었습니다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2004년 시와시학사)

 

 


 

 

김종태 시인 / 테헤란로의 나무 벤치

 -이건제 형에게

 

 

 떠나온 곳도 모르는 생이 예 있으니 빌딩 새를 스치는 바람의 나날들, 무상한 모래의 나라가 네온불빛 아래 아득하니 나는 나마트호(湖)의 목마른 낙타, 카비르산 밝은 달 아래 곤드레만드레 주인 남자를 태우고 카샨 지나 야즈드 지나 루트사막 모래 울음 속을 검부러기처럼 건너가리 케르만여관의 주인 과부는 아직 몸 뒤척이니 창틈에 여비를 떼어놓고 떠나면 어떠리 교교한 별빛 아래 목놓아 울어본들 말구유에 마른 사탕무잎이 다시 젖을까만 맨발로 보도블록 점자를 더듬으면 오지 않을 옛사랑이 흙먼지처럼 붉어져 추억은 오랜 만큼 아름다우리 시간의 폭풍이 몰아치면 흰 수염으로 온기를 엮어 엘리 엘리 엘리베이터 오를지니 정처 없음이야 세월밖에 또 무엇에 의지하리 행상을 지고 고원으로 향하는 모험의 사내들은 모르리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이 이 길의 빈 몸을 덮으면 새벽 단풍의 실핏줄 매만지며 밤푸르의 밤 푸른 오아시스 마을로 들어가리 끝내 꿈 깨지 않으리

 


 

김종태 시인 / 사다리

 

 그의 머리는 불타는 새를 향하고 있다 연기가 맥없는 날개를 타고 구름 너머로 흩어질 때 스스로 서 있다가 벽에 기대어 반쯤 눕기도 하는 부처의 등골이다 그가 혼신의 힘으로 구하려는 것은 누구일까 죽은 것과 산 것 사이로 피어나는 망령된 의심과 경계, 잡음이 지지직대는 무전기를 메고 올라 새의 알을 움켜쥐지 않았다면 어찌 허공 끝 둥지의 불씨를 떠 올 수 있었겠나 그의 맨 위쪽 횡목에서 피 묻은 음악이 흘러내린다 사위어 가는 잿더미를 중유(中有)처럼 부여안으니 비릿한 선율에 젖는 뼈대의 끝마디

 

 전생과 후생이 한 밧줄을 잡은 그의 몸에서 해가 진다

 

 있음과 없음이 한 똬리를 튼 그의 몸에서 달이 뜬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9월호 발표

 

 


 

 

김종태 시인 / 雪花

 

 

썩은 가지에 눈발이 살아 있다

絶俗 후 하릴없는 생각들이

겨울눈으로 허공을 껴안아

뿌리 쪽 관다발 어디쯤에선

물길이 막힐수록 빛나는 적요

죽음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生이 外道라면 눈은 또 무슨

경계의 밖인가 古寺의 숲은 밝아

여태 걸은 길들이 능선에 엉킨다

緣 없는 裸木들 반은 살아 반은 죽어

연록의 시절을 지우며 야윌 때

대처로 가는 길 영원히 막힐러니

 

 


 

 

김종태 시인 / 비올론첼로가 있던 겨울

 

 

철로 위를 홀로 걸어가듯 첼로의 G선을 따라

묵직한 겨울을 건너갔어요

내 삶엔 언제나 반주가 없어

음악도 없이 춤추는 건달이었지요

흠뻑 땀에 젖은 밤마다

우랴늄이 섞였을지도 모를

1.5리터 생수를 마셨지요

기차의 경적 소리가 들리는 겨울밤이었어요

그녀는 목을 휘감으며 무반주 조곡을

연주했어요 기차는 역에 닿아도

멈추지 않았어요

헐거운 우리 사랑엔 기러기발이 없어

경적이 첼로의 현을 따라 질주하는

플랫폼에 주저앉아 가락국수를 먹었어요

철길을 배회하는 그림자에 잘린 모가지

나는 너무 강한 슈퍼에고를 지녔어요

가슴은 아무리 슬픈 엘레지 앞에서도

꼼짝하지 않았어요

새벽에도 이불을 걷어차는 몸은

텅 빈 금고처럼 쓸모없이 잠겨 있었어요

그해 겨울

철로 위를 홀로 가듯 첼로의 E선을 따라

한 사람을 놓아주었어요

뽕짝거리는 눈보라 속으로

첼로를 내동댕이쳤어요

 

 


 

김종태 시인

1971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오각의 방』. 청마문학연구상, 시와표현작품상, 문학의식작품상 수상. 현재 호서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