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원 시인 / 인공바다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시간 꼴깍 꼴깍, 자꾸 손을 휘젓네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생각이 바닥에 닿질 않아
아무도 없네, 손을 잡아주는 이 그저 웃으며 나를 자꾸 밀어넣네 찡그린 두 눈썹 사이로
물안경은 최신형이구나 수영복 꽃무늬도 아주 화려하구나
페리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글램핑 리조트, 파도를 가르며 마침내 파도 없는 바다에 도착한 우리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영혼들
내가 잠시 빌린 백조도 유니콘도 웃고 있네, 내장도 두뇌도 바람인 애인들 먼 바다까지 나를 두둥실 태워갈 듯 물결을 가르던 허풍선이들 손을 내미는 척 멀어지면서, 매 순간 저 먼저 떠내려가면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었나요? 당신의 꼬리지느러미를 잘라 끓여먹었던가요? 혹시 태평양 횟집에서 디지털 파도소리 요란한 카페 라메르에서
짜지도 쓰지도 않고 밍밍한 가짜바다, 모래대신 시멘트가 밟히고 밤에도 낮에도 잠잠 잠들어 있는 바다 물밑에서도 발을 휘젓지 않는 우아한 비닐백조의 수궁
정채원 시인 / 옥상과 반지하 사이 방황하는 커서가 있다
왼쪽이 웃을 때 오른쪽은 방금 따귀를 얻어맞은 얼굴로
시퍼러둥둥한 오늘도 어금니가 0.01mm쯤 갈렸겠지
이가 나날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주식시장의 개미처럼 이를 악물고 영끌, 영끌!
삶은 어째서 늘 투자한 만큼의 이윤을 불러오지 못하는 걸까 손가락은 애지중지 삼시세끼를 챙기는 동안 두개골은 우주를 떠도는 미아가 되어
뜬구름 속 개 울음소리나 잡으러 다니다 코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뒤통수가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기)당신만을 사랑해요!(기) 모니터에서 화살표가 깜빡거리며 손짓하지만 (기)비상 착륙할지도 모른다, 모든 짐 다 버리고(기) 세상의 댓글은 늘 마감 직전이다
옥상과 반지하 사이 눈 감고 뛰어내리는 낙숫물 짜릿한 낙차가 있어 오한과 발열을 거듭하며 오늘도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정채원 시인 / 덧칠된 세계
고흐의 암울한 콧구멍이 여인의 젖가슴에 유두처럼 찍혀 있다 엑스레이를 비추면 파이프를 문 자화상* 아래 여인의 누드 반신상이 밑그림으로 앉아 있다
햇살 비쳐드는 방안에서 웃옷을 벗던 여인 이마 위로 흘러내린 숱 많은 머리칼과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던 분홍빛 볼은 검게 덧칠되고
자화상의 밑그림은 어쩌면 아흔아홉 떠나가라, 떠나가라, 떠나가지 마라 얼굴이 얼굴을 압정처럼 누르고 있는
덧칠된 시간이 다시 눈을 뜬다 감겨도 감겨도 사후까지 깜빡이는 눈동자처럼 가슴 맨 밑바닥에서
지워진 얼굴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다
어서 이 낡은 세계를 뒤집어다오 2백 년 묵은 불 꺼진 파이프를 여인의 누드가 깔고 앉는다 ― 점화!
* 반 고흐의 그림
『서정시학』 2023년 가을호 발표
정채원 시인 / 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
우리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엔 아무 것도 없다
칼날 같은 파도를 헤치고 난파선을 타고라도 가야한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져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순 없다 매 순간 떠나야한다
먼저 도착한 일당이 원주민처럼 텃세를 부리며 천길 벼랑으로 등을 떠밀지 모르지만 그곳에 원주민은 없다
이미 부러진 목이 다시 부러지고 무덤 속에 있던 반쯤 부패한 입술이 깨어나 푸른 립스틱을 바를지라도
우리는 기필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은 도착하자마자 이곳이 되고
그곳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가야할 이유만 있다 계간 『서정시학』 2023년 가을호 발표
정채원 시인 / 변검쇼 2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 양 손이 없는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밑둥만 겨우 남은 팔꿈치로 죽은 나무뿌리를 주워오기도 하고 캐오기도 한다 겨드랑이에 톱을 끼고 아내와 함께 톱질을 하고 조각을 한다, 죽은 뿌리가 여의주 입에 문 용도 되고 개도 되고 동자승도 되고 부처도 되고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 그대 손길에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
-{애지}, 2007년 여름호)
정채원 시인 / 나를 막지 말아요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경향신문/詩想과 세상』 2022.06.27.
정채원 시인 /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묵사발
한밤중보다 더 고요한 한낮 부엌 하수구에서 크르렁 크르렁 소리가 난다 물을 버린 적 없는데 무언가 버려지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의 몸부림 같은
어느 먼 별에서 누가 울고 있나 미끄러운 손이 놓쳐버린 약병 같은 끊어진 목걸이의 눈알 같은
느닷없이 부서진 목숨들이 묵처럼 엉겨 붙는 공기를 깨뜨리고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자들의 묵사발 같은 평화와 고요를 던져버릴 듯
축제의 날, 길거리 오디오에 휘파람을 날리다가 한순간 엉켜버린 시간과 공간 날벼락에 지금여기를 떠나가는, 그런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목숨들의 비명
아니야, 아니야 발이 닿지 않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엄마, 난 지금 죽고 싶지 않아요 여보, 애들도 어린데 아직은 나 할 일이 너무 ......
예고 없는 암전!
별빛이 갑자기 휘어져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빛들이 하늘에서 얼다가 바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새아침의 태양은 어김없이 시력 잃은 별들을 다 지우고 여름에도 서리꽃이 피고 화살 꽂힌 심장에서 녹아 이슬이 되고
낯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누군가의 아우성소리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도 모든 울음소리가 다 들리는 화창하고 고요한 한낮
하수구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사람은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계간 『포엠포엠』 2023년 봄호 발표
정채원 시인 / 딥페이크(deepfake)*
저녁의 볼은 어느 쪽부터 찌그러지기 시작했을까 한 번 놓쳐버린 것을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다는 표정의 바구니를 들고 헛손질을 몇 번 하다가 마침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듯 천천히 뭉그러지는 밤하늘
고층 빌딩들이 하나 둘 윤곽을 버릴 때 카드를 톡톡 찍으며 승차하는 사람들, 버스는 불 켠 눈으로 투덜거리며 달려간다 어딘가 만날 사람이 있다는 듯 인증 받아야 할 내일이 있다는 듯
지금껏 돌던 궤도도 동그란 원은 아니었지 늘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었지 힘겨운 원심력을 박차고 무너질 듯 튀어나갈 듯 아슬아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불 꺼진 종점이 있었지
얼굴 위의 얼굴을 벗는 시간 온종일 너무 밀착되어 벗겨도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이미 얼굴이 되어버린 몇 겹의 얼굴들 아래 더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본래의 얼굴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본래란 얼굴은 없었고 찌그러진 궤도를 숨차게 도는 유령들만 있었을 뿐
커다란 돌멩이로 마스토돈의 대퇴골을 조각냈던 고대인처럼 다시는 맞춰지지 않을 퍼즐로 신상神像을 박살냈던 그날처럼 밤의 두꺼운 얼굴을 부숴놓을 시간
*딥페이크(deepfake): deep learning과 fake의 합성어, 인공지능의 딥러닝을 이용한 영상 이미지 합성기술
계간 『사이펀』 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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