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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새로 보는 교회사] 가톨릭교회의 개혁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8.

 

 

[새로 보는 교회사] 가톨릭교회의 개혁 / 성녀 데레사

구본식 안드레아/ 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관상 수도생활의 변화와 완덕으로 나아가려는 신비사상의 발전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공이 아주 크다.

이들은 기존의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관상수도회의 수도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하였다.

 

 

가르멜회의 역사

 

가르멜회는 창설자가 없다.

수도회의 명칭은 엘리야 예언자가 살던 동굴이 있는 가르멜 산에서 유래하는데,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 산에 3~4세기경부터 사막의 은둔자들처럼 혼자서 동굴이나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가들끼리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12세기경부터 순례자들과 십자군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곳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경당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고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범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간단한 회칙을 만들어주었고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원장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관상기도 생활로 침묵과 가난한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 정착되는 수도원들은 탁발수도회로 분류된다.

 

1226년 호노리오 교황이 처음으로 규칙을 인준해 주었고 뒤에 여러 교황들이 가르멜회의 완화된 규칙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전처럼 한적한 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은수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탁발수도회처럼 사목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은 옥스포트, 파리, 볼로냐 등지에 학문을 연구하는 집을 지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첫째 관상생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설교와 사목도 하였다. 영성에서는 성모님과 엘리야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이름도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수도회’로 하고 성모님을 주보로 모셨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르멜회도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완화된 규칙을 선호하는 공동체와 좀더 엄격하게 살려는 공동체로 분리된다.

이때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가르멜회를 신비적인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회로 개혁한다.

  

신비신학의 발전

 

라틴계 나라 곧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더욱이 스페인은 루터가 나타나기 전부터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잘 조직되고 능동적인 살라만카 대학을 중심으로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루터파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유명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의 이단 색출도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성행하였다.

감성적이고 체험적이며 직접적인 종교심은 흔히 이단으로 흐르기 쉽다.

종교의 피상적인 관점만 취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치고 마귀적인 요소가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이단적인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비밀단체(Alumbrados)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의 종교적인 성향에서 유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위험에 대항하고 기도생활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통 신비주의가 발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과 관상생활의 발전을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가 높은 경지로 이끌어올린다.

신비신학적인 저술은 주로 기도로 나타나고 종교 재판소는 이런 기도가 미신적인지 이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데레사 성녀의 “완덕의 길”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신비신학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저술이 있었다.

마드리드의 알퐁소(1485-1570년)나 오수나의 프란치스코(1492-1540년), 라레도의 베르나르디노(1482-1540년) 등이 침묵 속의 기도 등과 같은 신비적인 체험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1535년에 저술한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시온산에 올라서”라는 책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기도의 방향을 알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하느님과 영혼 일치의 방법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일치를 내 안에서 느끼고 있었고 여러 번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STORIA DELLA CHIESA, Vol. VIII. Ed., S.A.I.E.P. 266)라고 한다.

 

신비체험을 깊이 있게 하고 그것을 표현한 데레사 성녀 이전에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수도자와 사제들도 있었지만 살체도의 프란치스코같이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

  

신비주의 수도영성

 

스페인에서 데레사 성녀 이전에 더욱 심오한 영성으로 수도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수도회를 개혁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알칸타라의 베드로는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 아니라, 1560년경부터 데레사 성녀와 친분을 가지면서 가르멜회를 개혁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람으로 스페인 왕과 교황 바오로 4세의 후원을 입어 프란치스코회를 옷에서부터, 공동체가 가난을 실천하는 데까지 더욱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필리핀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개혁의 바탕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대해서도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살아가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기도와 묵상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그는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완전하게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이 영성의 깊이를 가지도록 설교하였다.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기도생활과 복음에 근거한 윤리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내적 생활의 강조는 데레사 성녀가 수없이 반복한 “수도복이 수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l’abito non fa il monaco)”라는 정신이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는 그라나다의 루이지가 1554년에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도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하는 방법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주제 준비’ ‘주제를 위한 독서’ ‘주제에 대한 묵상’ ‘감사의 기도’ ‘봉헌’ ‘청원’ 등이다.

여기서 그는 정신적인 기도는 다른 의무를 다 관면할 만한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소의 지적을 받고는 1559년에 수정하여 새로이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관상기도 방법은 주제를 준비하고 주제를 위한 독서를 천천히 하면서 독서를 통해 묵상에 빠져들고 계속 주제에 머무르는 묵상기도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기억이 한꺼번에 작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수의 성녀 대 데레사

 

성녀는 1515년 3월 28일에 출생하여 1582년 10월 4일에 사망하였다.

데레사 성녀가 살아 있는 동안 온 스페인 사람들은 그녀를 알았다.

또 가르멜회의 개혁에 대해서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데레사 성녀는 가장 스페인적이면서도 전 세계적인 특성을 가진 성인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찾아 들어감으로써 가톨릭교회 일치에 큰 기여를 한 분이다.

 

성녀는 20세 되던 때에 강생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아빌라의 가르멜회는 부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수도자가 1432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인가한 완화된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공동체의 분위기가 느슨하였다.

봉쇄구역에도 외부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하는 등 가르멜회의 엄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레사 성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서적을 즐겨 읽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훌륭한 신비주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완덕을 향한 갈망이 생성되어 있던 성녀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도 데레사 성녀에게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다. 성녀는 영성 서적을 탐독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 줄 알았고, 상상이나 감정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신비주의를 자신 안에 종합할 줄 알았다.

긍정적이고 확실한 사고를 가진 여성으로서 교리의 진리와 가톨릭 신심을 융합할 줄 알았다.

 

성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537년과 1538년 사이의 겨울에 심한 열병에 걸려서 수도원이 아닌 시골에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3년 동안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는 그 체험을 살려서 영적 수련을 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며 대화를 즐겼다.

이렇게 1542년부터 1543년 사이에 느슨한 생활을 하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체험하였고 겸손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1560년 관상기도를 깊이 체험할 즈음, 옆에 늘 있던 조카가 더욱 엄격하게 은둔의 삶과 관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자는 제안을 하여 수도회 장상들에게 이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란치스코회를 개혁한 알칸타라의 베드로와 예수회원인 보르지아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지의 후원으로 1562년 8월 24일에 개혁된 가르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첫 수도원을 요셉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47세였고, 이후 열여섯 개의 수도원을 더 창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여자 가르멜회를 이전과 구분하여 ‘맨발의 가르멜회’라고 하였고 데레사 성녀와 뜻을 같이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맨발의 남자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지도하였다.

 

성녀는 사망한 지 40년 뒤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622년에 시성되었고 1970년 바오로 6세는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걸어야 할 ‘완덕의 길’을 제시하였다.

루터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두려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방법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데레사 성녀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은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이 노력해야 하는 방향이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완덕에 이르는 기도의 상태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 단계를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으로 비유하고 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든 일은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고, 좀더 쉬운 일은 양수기를 통해 배수관으로 물을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강이나 시냇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 땅을 흠뻑 적실 수 있고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으며 정원사가 할 일이 별로 없는 마지막 방법은 바로 충분히 내린 비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께서 우리를 적셔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수고도 느끼지 않습니다”(상게, pp. 282-283).

 


 

축일 10월15일 성녀 데레사(Tere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