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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8.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1)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

 

스페인 성지 순례를 갈 때 반드시 알아두고 가야할 성녀가 있다.

바로 아빌라의 테레사(Sta. Teresia Iesu de Avila, 축일 10.15)다.

이분은 동명의 소화 테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테레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맨발의 가르멜회’ 창시자이자, ‘예수의 테레사’로 불려 지는 성녀는 사실 ‘대 테레사’라는 이름에 못지않게 교회의 대 성녀이며, 큰 공적을 남긴 분이다.

 

테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귀족이었는데, 자녀들을 모두 가톨릭 정신에 입각해 교육시켰다.

테레사는 그 영향으로 일곱 살 때부터 네 살 위인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성인전을 즐겨 읽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감동하여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몰래 집을 나간 일도 있었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테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성모님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19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녀는 처음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 모든 정성을 다해 소임에 임했다.

이 일을 통해 테레사는 말할 수 없는 감미로운 위로를 맛보았으며, 나중에는 자신도 돌보는 환자의 병에 걸렸으면 하고 원하게 될 정도였다.

 

기도가 허락이 되었음인지 테레사는 병석에 눕게 됐고, 이후 몸이 늘 허약했다.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완덕을 열망했던 그녀는 세속화된 수녀원을 바라보며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던 중 테레사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상본을 보고, 자신의 냉담한 신앙을 깊이 부끄럽게 여겼다.

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는 스스로의 영혼이 처한 한심스러운 처지를 깊이 느끼게 된다.

테레사는 이 시점에서 영적으로 크게 변화되게 된다.

고해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때까지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후부터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나 자신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테레사 신비 생활의 첫 출발점이다.

그녀의 학식은 깊은 것도 아니었지만 ‘영혼의 성’을 비롯한 그녀의 저서들은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가톨릭 영성의 위대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심오한 신비계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녀가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테레사 안에 계신 주님이 스스로 적으신 책이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안으로는 영(마음)을 신비계로 몰입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가르멜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 이유로 테레사는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다.

마침내 테레사의 개혁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각처에 있는 여자 수도원은 물론 남자 수도원에까지 큰 자극을 주게 된다.

 

이는 테레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느님께선 테레사를 기꺼이 여기사 가끔 신비스러운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이러한 테레사의 신비 생활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는 길이 아니고 가시덤불이 가로놓인 험악한 길이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녀에게 여실히 적용됐다.

고행, 겸손, 희생 등은 그녀가 평소에 지닌 십자가였다.

테레사는 그런 십자가를 열애했다.

이는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한 그녀의 말이나, “테레사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녀를 학대하거나 또는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고 한 아빌라의 주교의 말에 비추어 알 수 있다.

 

테레사는 극기 수덕의 길을 걷는 도중 1582년 9월 2일, 67세에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눕고, 뒤이어 10월 4일 사랑하는 하늘의 배필을 만나 뵈러 영원한 길을 떠났다.

임종이 임박하자 그녀는 주님과 영원한 일치를 할 기회가 왔음을 즐겨 기뻐하며, 얼굴에 희색을 감출 수 없어 몇 번이나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를 거듭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한다.

1622년에 시성됐으며 1970년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2) 수많은 고통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때, 테레사는 6살이었다.

테레사는 이후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라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도 훗날 교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녀의 선택은 루터가 선택한 ‘교회 밖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개혁’이었다.

테레사의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느님의 형성 신비 안에서 이뤄졌는지 그 섭리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적으로 형성이 잘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미리 형성되도록 심어놓으신 그 어떤 신비를 잘 좇아야 한다.

그럴 때 최종적으로 형성하는 신적 신비 안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후에 이웃을 형성시키고, 사회를, 세계를, 우주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형성시킬 수 있다.

 

성녀의 내면 형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성인전을 즐겨 읽는 등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기름진 내면을 가꾸어 나갔다.

실제로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겠다고 울며 기도할 정도로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영감을 많이 받았고, 그 영감을 자신의 내면에서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아빌라의 테레사의 선형성을 완성시켜 나간 방법은 육체적 고통이었다.

그녀는 몸이 나약해 평생 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병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건강하고 부유한 것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병의 고통이 전적으로 악이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큰 기둥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나약성, 즉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잠재력이다.

테레사 성녀는 이 두 가지의 성향을 정확히 이해하신 분이다.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신 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완벽해 지려고 하고, 늘 완벽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나약성과 한계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고, 진정한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로부터 힘을 받아서 생활을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이라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의 힘으로만 생활을 하면 언젠가 모든 것이 허무해 지고,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제 테레사가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해야지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때 하느님께서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테레사에게 ‘책’을 연결해 주신다.

그렇게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을 읽고,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완덕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테레사에게도 첫 번째 시험이 다가온다.

장상 수녀님께서 중병에 걸린 병자들을 간호하는 소임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임을 받은 것 자체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다.

더욱 깊이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 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나는 어떤 모습이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지금 나는 돈 좀 벌었다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우쭐한 모습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겸손한 모습인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병자들을 간호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또 이 사회에 대해 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당시의 의학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는 의학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주위에는 의술로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삶을 원하는 만큼 꽃피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테레사는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환자들의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제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수많은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진정으로 매달릴 곳은 오직 우주를 형성하고, 세상을 형성하고, 이웃을 형성하고, 나 자신을 형성하는 하느님 한 분 뿐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3)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 위해 ‘고통’ 청해

  

테레사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면서 단순히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자신도 환자들과 같은 병에 걸리고 싶다는 기도를 바치게 된다.

대단히 높은 경지의 갈망이다.

 

테레사는 “하느님 제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갈구했다.

그래서 “저도 이 병에 걸려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테레사가 보기에 환자들의 눈빛과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일치의 갈망을 담고 있었다.

또 하느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환자들과 같은 뜨겁게 달궈진 마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병에 걸려서 하느님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그 환자들처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지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갈망은 은총을 불러온다.

은총의 결과가 갈망이기도 하지만, 그 갈망의 은총을 받아들이면 갈망은 더 큰 합치의 은총으로 이어진다.

 

이제 테레사에게는 그 은총의 첫 단초가 주어진다.

테레사의 영적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회심의 기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소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다.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성당에서 이뤄진다.

테레사는 기도 중이었다.

그때 테레사는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상본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등 지금까지 해온 몇 가지 사랑 행위들은 그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레사 자신이 이웃에게 베푼 사랑은 인류의 죄를 위해 인간에게 매질 당하는 그 사랑에 비하면 티끌보다도 작은 것이었다.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테레사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위해 더 깊은 기도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책을 통해 왔다.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을 읽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참회를 보면서 진정한 감동을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참회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체험은 테레사의 내면을 더욱더 깊은 형성의 신비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바로 테레사 말년에 저술로 드러나는, 신비신학의 태동 기점이 된다.

 

아마도 이때가 한 30세 정도 되지 않았겠는가 추정된다.

그 열매는 약 17년 후에 나타난다.

47세 때 드디어 개혁 가르멜회인 ‘맨발의 가르멜회’(The Discalced [Barefooted] Carmelites)를 창설한다.

 

여기서 개혁 가르멜회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에 가르멜회가 있었고, 그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레사의 맨발 가르멜회를 알기 위해선 우선 기존 가르멜회에 대해 알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가르멜회(Order of Our Lady of Mountain Carmel)는 계율이 엄격한 관상(觀想)수도회로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19장)까지 소급된다.

 

가르멜 수도회의 순수 관상의 정신은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내적인 삶의 체험을 무엇보다 선행시키며 중요하게 본다. 그 기원은 이렇다.

가르멜산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으로 예언자 엘리야가 이 산에서 늘 기도를 올렸다.

가르멜 수도회는 특별한 창설자가 없는데, 엘리야의 모범을 따라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면서 성서를 토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다 1205년부터 1210년까지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알베르토(St. Albertus)에 의해 성 브로카르도(St. Brocardus) 수사에게 공동체 삶을 위한 첫 규칙서가 주어졌다.

이 규칙서는 1247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인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이후 가르멜 수도회도 한때 규율이 해이되고 쇠퇴해 갔는데, 많은 이들이 초기 정신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이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가르멜의 중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개혁된 수도회를 ‘맨발 가르멜회’라고 한다.

 

테레사는 17개의 수도원을 창설을 하고 저술을 남기는 등 왕성한 활동에 본격 나서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가르멜회가 바로 이 테레사 성녀에 의한 ‘맨발 가르멜회’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4) 육체적 나약함·고통으로 ‘합치의 신비’ 체험

 

47세에 수도원 개혁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한 테레사는 이후 67세까지 살면서 20여년 동안 17개의 남녀수도원을 창설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사의 저술 작업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첫 발걸음은 소박했다.

지도 신부님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테레사에게 책 집필을 요청했고, 테레사는 이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체험을 담담히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나온 것이 불후의 명저인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 등이다.

 

이 과정에서도 테레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병과 싸워야 했다.

병은 평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테레사는 그렇게 병의 고통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불평한다.

나약함과 못남에 대해 불평한다. 나는 왜 키가 작을까.

나는 왜 코가 낮을까. 나는 왜 머리가 나쁠까….

 

자신의 약점이 사실은 장점으로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실수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를 지금 있는 모습으로 창조해주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 깊은 섭리의 신비를 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테레사는 육체적인 나약함과 이로 인한 질병의 고통을 하느님과의 깊은 합치를 이루는데 좋은 도구로써 사용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나 자신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내면 형성의 길이다.

 

이제 테레사의 이러한 내면형성은 상호형성으로 이어진다.

내면이 형성되면 이 형성의 신비는 곧 이웃으로 확장되고 파급된다.

테레사는 환자를 돌보는 행위 자체도 사회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합치를 이루는데 도구로써 활용했다.

테레사는 자신의 나약함과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초자연적 생활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테레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수도원이라는 상황을 잘 적응해 나가며, 상황 형성을 했고, 이 상황 형성을 바탕으로 무한히 세계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넓힘으로써 세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 형성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이들을 영성적 삶으로 이끌어 주는 저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테레사는 이렇게 보석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형성하는 신적신비의 뜻을 온전히 실현시킨 분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육체적으로 나약한 한 인간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문제는 그 하느님의 의지와 섭리에 우리가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있다.

호응한다면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불만족하며 건조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교회와 사회가 하느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한 삶을 거듭하던 종교 분열 시기에 태어난 테레사는 탁한 구름과 공해를 깨끗이 벗기고 인간이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하느님 당신께서는 어떤 분이신지를 종합적으로 깨닫고 공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다.

이런 분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따르고 배울 삶의 모델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테레사 이후 교회의 모습,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해야 할 몫도 크다. 우리는 테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안에 합치하고 그 합치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더욱더 초월적으로 변형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겸손하게 청해야 한다.

우리가 당신의 모상으로서 닮은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진정으로 신비신학의 절정에 이르셨던 분이다. 테레사는 그 체험한 것을 과학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로 남겼다.

만약 테레사 성녀가 신비 체험을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신비의 언저리조차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과연 테레사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체험했느냐 하는 문제다.

테레사 성녀의 영혼의 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성녀가 말한 기도의 단계는 과연 무엇일까.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5) ‘영혼의 성’에 들기 위해 겸손 · 순종의 덕 필요

  

하느님 신비를 어설프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단순화 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지극히 신비스런 내용을 담고 있는 테레사 성녀의 저술들을 쉽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잘못된 내용을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가진 한계를 감수하고서라도 성녀의 신비 체험을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영혼의 성’을 보자.

우리는 영혼의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성 밖에서 살며 혼란과 번뇌 속에서 산다.

세상과 나를 해석하지도,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어느 때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이 영혼의 성에는 7개의 방이 있다. 소위 말하는 1궁방에서 7궁방까지의 방이 그것이다.

1궁방, 즉 첫 번째 방에는 독충과 벌레들이 득실거린다.

기도를 하려는데 파리가 나타나면 기도가 되겠는가.

성체조배를 하려는데 모기가 팔위에 앉았다면 조배가 되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기도를 하고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독충과 벌레가 가득찬 마음으로는 올바른 기도에 정진할 수 없다.

여기서 독충과 벌레는 과거의 삶에서 습관화 되었던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육신과 정신적인 무의식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서 기도를 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영적 지도가 필요하다.

모기와 파리를 쫓는 방법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하다.

수영을 배우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훌륭한 수영 강사로부터 수영 기법을 배우면 자신감 있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다.

 

테레사의 기도 9단계에서 이 상태가 바로 구성기도 1단계다.

이 단계에서 지도 방법은 극히 간단하다.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이 단계에선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다.

그냥 동화책을 많이 읽어 주고, 감성과 지성을 훈련하면 된다.

성당에 처음 온 예비신자에게는 신학적인 논쟁이 필요 없다.

처음에는 그냥 주요 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묵주기도 방법을 알려주고, 성경을 읽게 할 따름이다.

성경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영성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한다.

 

자 이제 2궁방으로 넘어가 보자.

이 방에는 큰 독충이나 큰 벌레는 없다.

하지만 작은 독충과 작은 벌레들이 아직 남아 있다.

기도 덕분에 큰 벌레는 없어졌지만 아직 작은 벌레들은 남아 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갈등의 시기다. 기도를 하다보면 무릎이 아플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 같지도 않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괜히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머리 아프게 살지 말고 옛날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살고 싶을 수도 있다.

듣기는 듣되 말할 수 없고, 알기는 하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다.

 

3궁방으로 들어가면 작은 벌레도 이제 어느 정도 제거 되어 있다. 마음의 평정이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다.

대죄는 모두 사라지고 아주 작은 소죄만이 남겨지게 된다.

그런데 과거에는 대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소죄조차도 이제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소죄마저도 없애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희생을 바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이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권태기도 이때 찾아온다.

어느 정도 육신적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노력은 했지만, 비례적으로 영적인 성장 노력은 부족해 영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다보니 지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득도 별로 없어 보이고,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3궁방까지 설명한 이 글을 읽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실제로 수행을 하다 보면 3궁방까지 들어가는데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3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을 포기하게 된다.

열심한 마음으로 본당 사목회와 교회 내 각종 단체들에서 봉사하다가, 지치게 되면 더 이상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

여기에서 제일 필요로 하는 덕이 겸손의 덕과 순종의 덕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영혼이 메마르게 되면서 4궁방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는데….

 

4궁방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4궁방은 어떤 모습일까.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6) “하느님과의 맞선 자리에 초대합니다”

  

본당 사목회를 비롯해 각종 교회 내 단체에서 봉사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열성적으로 일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그냥 머무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어진 교회 직책은 그런대로 수행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장님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3궁방을 넘어, 4궁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4궁방에선 초자연적 기도가 가능해진다.

3궁방까지 지성과 이성과 기억,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초자연적인 기도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초자연적 기도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총의 신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왔지만, 이젠 그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능동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수동적 차원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궁방까지는 나 자신이 노력을 해서 물을 길어먹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접 물통을 들고 수고스럽게 수 킬로미터 떨어진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서 먹었다.

하지만 4궁방에서는 집까지 연결된 수돗물에 입만 대면 된다.

조금 다른 비유로 들자면,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젖과 비슷한 분유를 먹었다면, 이제는 직접 어머니의 가슴에 입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돗물이나 어머니의 젖이 그리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단계다.

그래서 일부는 직접 물을 길어도 마시고, 분유도 함께 먹어야 한다.

 

진정한 하느님과의 합치는 5궁방에서 구현된다.

이 단계에 대해 테레사 성녀는 기막힌 비유를 들었다.

하느님과 맞선을 보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화 통화만 하고, 글만 주고받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는 단계다.

그분을 직접 보게 되니 더욱 매력이 넘치는 분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한층 더 불타오르게 된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단계는 ‘일시적’ 해탈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맞선은 직접 만나는 것이다.

정식미팅(meeting, blind date)이다. 일반적으로 미팅을 할 때 우리는 처음에 정신적인 차원에서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묻고,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묻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한다.

이렇게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끝나고 마음이 끌리면 그 다음에는 정감어린 대화를 시작한다.

그렇게 정감으로 끌리고 나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앞에 있는 미팅 대상자를 진정으로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A도 만나고 B, C, D 등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A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B와 C, D를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주로 A와 많이 만나게 된다.

온전히 A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지금까지 1~4궁방까지는 소위 펜팔과 전화 통화의 단계였다.

그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많은 좋은 것을 줬는데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따질 때가 많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얼굴을 맞대고 정식으로 맞선을 보니, 그동안 상대방이 이야기 했던 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을 모두 열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맞선을 볼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나간다.

앞에 있는 상대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분별이 필요하다.

그 분별을 해 주는 분이 부모님이다.

여기서 부모님은 바로 영적 지도자다. 5궁방에서는 초자연적 기도 단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주시는 여러 은총에 대해 잘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함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거짓된 환상을 보고 진정한 체험으로 착각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환시와 환청을 하느님의 계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맞선에 나선 여성은 나이가 어리기에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부모님이 옆에 있어서 네가 선택한 A가 정말 바른 사람이다 라고 분별을 해 주어야만 딸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기 결혼하는 사람(악마)은 나이어린 젊은 여성(영적 초심자)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부모님까지 속이긴 힘들다.

부모님은 얼굴만 보고서도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다.

물론 부모님의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 지도를 받을 때 올바른 결혼을 할 확률은 높아진다.

 

자! 이제 맞선이 훌륭히 끝나면 무엇을 하는가.

약혼을 한다. 약혼 뒤에는 결혼을 한다.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7) “영혼의 성에서 제2의 그리스도 삶을 살다”

 

5궁방에서 하느님과의 맞선 후,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면 의외의 현상이 찾아온다. 고통이 찾아온다.

당신 얼굴을 뵈옵는 그 환희의 신비 뒤에 고통의 신비가 따라온다.

그 고통의 신비를 뛰어 넘어야,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이라는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가 가능해 진다.

 

1∼4궁방까지도 물론 고통이 있었다. 희생과 봉사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5궁방에서의 고통은 그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내가 느낀다.

 

이 단계에서 만나는 또 다른 변화는 정신적 차원이 약해지고 영적인 차원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진복팔단의 신비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이제 과거의 독충과 벌레들이 빠져나가고 당신께서 주시는 것,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다 보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진리를 ‘오오!’하고 무릎을 탁 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그 밑바닥까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 3궁방까지는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있었던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5궁방에 들어오면 조금 안심을 할 수 있다.

한때 신앙에 심취했다는 사람도 3궁방 수준에 머물면 언제든지 다시 냉담할 수 있다.

5궁방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든든한 영혼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인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 다음, 6궁방으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점차 약해지고 하느님이 강해진다.

주도권은 이제 하느님께 넘어간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별로 없다.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 얼마나 좋고 신비스로운지 나는 다만 가만히 응시하고 만끽할 뿐이다.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 6궁방의 신비를 체험하면 참으로 강해진다.

당신이 이끄시는 힘이 얼마나 센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합쳐도 당신의 힘에는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모함과 공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게 된다. 하늘에서부터 오는 진정한 행복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모든 당신 가르침에 순응하고 순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모함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게 된다.

순교자들이 목숨까지도 쉽게 내 놓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체험 때문이다.

이 6궁방에서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반적인 행복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제 하느님이 눈앞에 늘 아른거린다.

결혼 초창기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옆에 없어도 늘 보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군대에 가면, 여인의 마음은 애인과 군대에서 함께 훈련을 받는다.

사랑하는 남편이 직장에 가면 아내의 마음은 늘 남편과 함께 있다.

이렇게 이제는 하느님이 그냥 보이고, 그분이 계속 옆에서 말씀해 주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가지 놀라운 체험을 한다.

이곳에서 설명하기가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바로 죽음에 대한 원의다.

죽음을 원하게 된다.

하느님을 빨리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지복직관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 7궁방에 들어가면 이런 체험도 없어진다.

죽고 싶지 않고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하느님과 완전히 합치된 상태다. 단지 영(마음)으로만 하느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과 지성으로 완벽하게 하느님을 느낀다.

눈과 귀가 영적인 눈, 영혼의 귀가 된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적인 몸으로 음식을 섭취한다.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잠기게 된다.

나는 완전히 초월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 묶여있던 내가 하느님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상태로 변화된다.

이 같은 영혼의 성 각 궁방을 테레사 성녀가 말한 기도 7단계로 나눠 보면, 구성 기도(1궁방)와 추리적 묵상(2궁방), 정감의 기도(3궁방), 단순함의 기도(4궁방), 일치의 기도(5궁방), 순응일치의 기도(6궁방), 완전히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변형 일치의 기도(7궁방)가 된다.

 

7궁방 변형 일치의 기도는 완전히 없어지는 무(無)이지만 동시에 초월(超越)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하느님을 닮은 제 2의 그리스도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축일 10월15일 성녀 데레사(Tere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