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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브루노 사제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8.

 

성 브루노 사제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엄격한 관상 수도회 카르투지오 회의 창립자인 브루노는 1032년경 독일 쾰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쾰른에 있는 성 꾸니벨트 학교에서, 청년 시절에는 프랑스 랭스에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공부를 마칠 때쯤에는 이미 훌륭한 시인에다 탁월한 철학자요 신학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 랭스 학교에서 18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그에게서 높은 성덕과 가르침을 전해 받은 제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 중 한 인물이 교황 우르바노 2세였다.

랭스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랭스 대교구의 고문이 되기도 하였다(1073년).

제자들은 그를 “올바른 길의 안내자, 예지의 스승이며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분”으로 설명함으로써 교사로서도 대단한 명성을 날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교회 쇄신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성직 매매 사건으로 말썽을 일으킨 랭스 대교구 마나세 1세 대주교가 브루노의 규탄으로 퇴위하게 되자 교황사절은 그를 대주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극구 사양하고 그리스도의 가난한 생활 즉 수도 생활을 원하였다.

후에 시토회의 창립자가 된 성 로베르또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찾아갔다.

그에게서 은수 생활을 권고 받고, 그러한 장소가 많은 그레노블 교구에 가서 왕년의 제자였던 성 후꼬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후꼬 주교는 꿈에서 샤르뜨루즈 유곡 위에 일곱 개의 벌이 떠 있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브루노와 여섯 동료들을 보고는 그들이 바로 꿈속의 일곱 별들임을 확신하여 꿈에 본 그 장소로 그들을 인도하였다.

브루노는 그 장소를 보고 자신의 이상에 너무나 꼭 들어맞는 곳인지라 참으로 기뻐하면서, 그곳에 소성당과 일곱 개의 작은 초막을 지었다.

그리고는 기구와 묵상, 노동 생활을 하며 청빈을 지키고 엄격한 침묵 생활을 했다.

이것이 카르투지오 회의 시작이었다.

해발 l,500피트의 골짜기에서 6년 동안 그 공동체를 이끌었지만, 그는 너무 유명해져 더 이상 침묵의 은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090년 그의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스승을 흠모하여 브루노를 교황청으로 불렀다.  브루노는 순명의 정신에 따라 눈물을 흘리며 은수처를 떠났고, 교황의 보좌로서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은수 생활에 대한 동경을 어찌할 수 없었다. 교황도 그의 뜻을 이해했으나 일단 렉기오의 대주교로 임명코자 하였다.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은수 생활을 간청한 나머지 허락을 얻었고,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을 찾아 샤르뜨루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감추인 생활이었지만 빛나는 성덕은 곧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온 시칠리아의 영주 로저 백작이 이들의 생활을 보고 감탄하여 남 이딸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있는 라 또레의 땅을 기증하였다.

브루노와 동료들은 여기에 각각 떨어져 있는 독방들과 기도실을 신축하는 등 두 번째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침묵과 고독 가운데 지냈으며 대축일에만 함께 식사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일의 하나는 성서 사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카르투지오 회의 회헌을 쓴 일도, 수도원을 설립할 의도도 없었으나 첫 카르투지오 회의 회원들이 생활한 규범이 회헌으로 정리되고, 그들에 의해 창설자로 추앙되었다.

그는 “한 번도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개혁된 적이 없는 수도원을 창설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시적 감정도 풍부하였다.

그의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금욕에 대한 두 통의 편지와 시편 주해 및 사도 바오로 서간의 주해, 그리고 죽기 전에 받아쓰게 한 신앙고백서와 속된 세상을 경시하는 14절의 비가가 있다.

 

1101년 10원 6일 칼라브리아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렀다.

그 동안의 부족했던 점을 용서 청하고 신경을 외면서 이 세상에서의 은수 생활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라 또레의 성 마리아의 은수자 묘지에 묻혔고 그 뒤 그곳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성 스떼파노 성당에 안치되었다(1193년).

1514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623년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10월 6일로 축일이 정해졌다.

 

현대는 활동의 시대이다. 성직자건 수도자건 평신도건 모두 뛴다.

얼마나 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떻게 뛰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도 성인을 본받아 침묵과 고독 중에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등한시하지 말아야겠다.

참다운 힘은 거기서 솟아나고, 그 힘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축일 10월 6일 성 브루노(Bru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