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영성사]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1)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프란치스코 고야 이 루치엔테스-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2천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분이자 영성가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는 워낙 유명하여 대(大) 그레고리오라고 한다. 성인의 영성은 루가 10, 38~42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말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활동과 관상생활의 종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540년 경 로마의 유명한 빠뜨리치오 가문에서 출생하여(이 가문에서 펠릭스 3세와 아가삐또 교황이 배출되었음) 훌륭한 교육을 받고 부모의 권유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로마의 지사와 원로원 의장을 맡아 책임감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식과 실무 경험을 쌓았다. 부친이 사망한 후 공직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저를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묵상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서를 연구하고 수행생활에 힘썼다.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제품을 받은 후 교황사절의 임무를 띠고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그리스 말은 몰랐으나 해박한 지식과 공직생활의 많은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동행한 수도자들과 함께 그 곳에서도 수도생활을 하였는데 동방교회의 수도자들의 요청에 의해 구약성서 욥기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그 강연집을 모아 후에 윤리서를 저술하였다.
로마에 돌아와 교황의 고문으로 지내다가 교황의 서거 후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너무나 겸손한 그는 교황직을 거절하였으나 "괴로운 심정으로 영예의 짐을 떠맡았으며, 너무 슬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영혼의 눈은 슬픔으로 어두워졌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라벤나의 교구장 요한 대주교는 교황직을 수락하기를 꺼려한 그를 꾸중하였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좌에 오른 후 자신의 입장을 밝힌 유명한 사목규범서를 책으로 엮어 그에게 답신 형식으로 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주교직과 교회 장상의 큰 책임과 그것의 부담스러운 성격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외에도 에제키엘서에 관한 설교, 복음서 해설, 대화록이 있다. 특히 대화록은 베드로 부제를 내세워 대화를 나누면서 교황 자신의 영성적이며 윤리적인 사상을 전하고 있고 성 베네딕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가장 훌륭하고 실제적인 근거가 되는 자료이다.
성인의 영성은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성생활의 발전 단계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제1단계는 악습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온갖 사욕편정을 억제하려는 영적 전쟁을 하는 단계이다. 이 훈련이 잘 된 영혼은 제2단계인 덕행의 성장기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신망애 삼덕인 신학적인 덕행들도 필요하지만 윤리 덕행이 없으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므로 이 덕행들을 성장 발전시켜 나가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덕행은 성령의 작용으로 완성에 이르게 된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 그는 이를 통해 높은 영적 단계인 관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루가 10, 38~42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관상생활을 우위에 두었다.
특히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상(觀想)과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마치 사도 성 바오로가 하늘 3층까지 올라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활동가였던 모세도 지성소에 들어가서 천상의 일을 관상하였다. 그러므로 활동에 종사하는 영혼의 목자들과 다른 이들도 깊은 내적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관상생활은 성령의 선물을 통해 완덕으로 이끌며 활동 안에서 열매 맺는다.
카를로 사라체니-성령의 영감으로 저술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그리스도교 영성사]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2)
성인은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남긴 작품들은 거의 사목적이었다. 그는 교회 전례와 성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동방 교회와 기타 여러 지역 교회와 관계를 정상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특히 아우구스띠노 수사를 중심으로 40명의 수사들을 영국에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 섹슨족,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등 여러 민족들과 종족들의 문화와 기질의 차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다소 시간은 걸렸으나 가톨릭이란 이름에 걸맞는 포용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와 수도원 제도는 전통적인 문화의 빈곤을 느끼던 여러 민족에게 그리스도교 유산을 전해줄 수 있었고 교황의 가르침이 기도생활과 수도생활 그리고 그리스도교 수덕생활에 관한 지침서처럼 인정되었다. 그 당시 여러 민족을 수용한 유럽 교회는 대중적인 면에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교부시대에 속하지만 중세기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신분이었다. 성직자, 수사, 수녀, 평신도는 각 신분에 맞는 신원을 보유했으며 각 신원에 고유한 영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평신도 중에서도 일반 신자와 보다 열심한 신자로 구분되었고 그들은 세례 받기 전에 신앙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일부 이교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목적 그리고 성실성의 의무를 강조하는 혼인의 지식을 배우고 미신과 마술을 끊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여러 가지 방법을 조금씩 배워 익혀나갔다.
한편 경건한 신자들은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참회하고 수도원 주위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평신도 특권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신도들은 수도원의 기도시간에 참여하여 함께 기도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소박한 옷차림을 하였고 독신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졌으며 기혼자들도 혼인의 의무를 충실히 해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후대에 생긴 제3회원이나 재속 수도회원들의 생활양식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그들 중의 무식한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나 성모의 호칭기도나 주님의 기도 또는 성모송을 여러 번 바치는 기도서가 생겨났다.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의 생활도 안정적이지 못하였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가르침에 의해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제단이 강화되었고 성무일도 기도와 사목활동, 즉 전례거행, 성사 집전 및 설교 등을 위한 성당이 지정되어 사제들이 배치되었다. 이리하여 사제들의 영성생활이 강조되었다.
이 시대의 영성에 큰 기여를 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전체 교회에 수덕생활의 모범이었다. 그 이유는 많은 주교들이 수도자 출신들이어서 훌륭한 사제 생활과 성사 집전 그리고 설교 등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도록 권고하였고 일반 신자들에게는 육체노동을 신성시하여 그리스도교 사랑과 수행생활의 표시가 된다고 강조하였으며 공적인 전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종합적으로 보건대 교황 대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영성에 바탕을 둔 발전적이고 풍요로운 기초를 놓은 위대한 영성가이자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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