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이달의 성인] 성 치프리아노 순교자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2.

 

[이달의 성인] 치프리아노 순교자(200/210-258)

윤 클레멘트 신부

 

 

주교요 교부이며 순교자인 카르타고(Carthago)의 치프리아노(Cyprianus)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본래 수사학자, 법률가, 교사였지만 세상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를 느끼던 중, 246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제 코엘리치우스(Coelicius)를 만나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는 세례 얼마 후에 사제품을 받는데, 249년에는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된다. 그는 또한 성서에 있어서도 전문가가 되고 저술가로도 이름을 알린다.

 

그는 249년 데키우스 황제 박해 때에 잠시 피신하기도 하지만, 피난 중에도 편지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교구를 계속 돌본다.

그는 자신의 교구사제인 노바티아누스가 한 번 배교한 신자들을 아무런 회개의 과정도 없이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교회의 규율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배교한 신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기간 동안 유보하였다.

 

251년 3월에 새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는 배교했던 신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지금까지는 관용주의자이던 노바티아누스는 배타적인 엄격주의로 돌아선다.

노바티아누스는 결국 로마의 교황과 대립하여 이교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기에 이른다.

이 무렵에, 치프리아노는 ‘가톨릭교회의 일치’, ‘배교자들에 관하여’ 등의 저술로, 신자들이 이설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했다.

 

252-254년에는 아프리카에 무서운 흑사병이 돌았는데, 그는 온갖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그 병의 퇴치를 위해 싸우며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그 흑사병을 빌미로, 그를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으려고 하였다.

흑사병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진노하여 그 병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데메트리아누스에게’, ‘죽음에 관하여’ 등의 책을 써서, 떠도는 유언비어를 반박할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로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알리려고 하였다.

 

그런 일들이 있은 후, 아프리카의 여러 주교들이 교황 성 스테파노 1세와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교황이 이단자들이나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255년에 치프리아노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으로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들이나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세례 받은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일로 치프리아노는 교황 스테파노 1세와 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무렵에 로마황제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집회를 금하고, 모든 주교와 사제들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예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칙서를 반포한다.

이에 반대하던 치프리아노는 결국 체포되어, 카르타고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쿠르비스로 유배된다.

그러다가 258년에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는데, 그는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9월 14일에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라틴문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시대적 어려움과 박해의 시련들 속에서도, 교회, 사목, 성사, 성서,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을 남겼다.

그는 박해시대 초창기 우리 교회의 한 위대한 교부, 저술가, 순교자로 현양(顯揚)받는다.

 


 

 

 

[이달의 성인] 성 치프리아노(+258)

윤 클레멘트 신부

 

 

우리는 성 치프리아노를 기념할 때, 교황이었고 순교자인 성 고르넬리오(+253)를 함께 기억한다.

우리 교회는 미사경본 성찬 기도문에서도 두 순교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약 200년경에 카르타고(Carthage, 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도시국가, B.C. 146에 멸망)에서 출생한 성 치프리아노는 강연, 웅변술 교사,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체칠리안(Caecilian)이라는 사제에 의해 감명을 받아 그의 삶은 전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는 곧이어 세례를 받고 독신의 동정(童貞)으로 살 것을 서원하는데, 그 후로 그동안 사랑해 오던 모든 이교(異敎)의 활동을 포기하고 사제로 서품된다.

 

서품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는데, 주교로서의 그의 성직수행은 친절과 굳셈이었다.

한편, 그 무렵에 새 황제가 된 데치우스(Decius, 249-251)는 모든 제국민(帝國民)은 이교신(異敎神)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칙령을 내린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버렸고, 두려운 나머지 이교신에게 제사를 바쳐야 했다.

 

치프리아노는 비밀리에 성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교구의 신자들에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믿음과 일치를 가져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며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배교(背敎)했던 교우들일지라도, 돌아와 참회하는 이들에게는 일정한 보속을 하게하고는 성체를 모시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그가 부재중이었던 어느 때에 노바투스(Novatus)라는 사제가 아무런 참회와 보속의 과정도 가지지 않은 채, 배교했던 사람들을 모두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노바투스는 성직계급과 평신도 지지자들 사이에서 분리주의를 펼친다.

 

그래서 주교였던 치프리아노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노바투스를 탄핵하였다.

노바투스는 자신을 따르던 그룹의 사람들을 로마로 데리고 갔다.

노바투스는 로마에서 자신을 스스로 주교라고 선언하고 자신을 따르는 분리주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하느님과 교회를 배교하였던 사람들을 아무런 참회와 보속의 절차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지도자가 된 노바투스는 정통교회로부터 멀어져 갔다.

결국 카르타고의 주교인 치프리아노의 지지를 받던 교황 고르넬리오는 노바투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교회공동체로부터 파문(破門)하기에 이른다.

 

252년에서 254년에는 온 나라에 역병이 돌았는데, 치프리아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구원과 치료의 조직으로 그들을 돕는 한편, ‘도덕성에 있어서(On Morality)’라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 때에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서 신이 노하여 역병이 돌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257년에 황제 발레리안의 박해를 맞아, 치프리아노는 이교신에게 제사를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자 그가 말했다.

“그러한 제사는 재고할 필요도 없다.” 그는 사형을 언도하는 집정관에게 ‘천주께 감사!’로 응답한다.

휘광이의 칼날을 받기 전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후, 실로 거룩하고 숭고하게 칼을 받으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드린다.

그는 편지, 강론, 논문, 성서주석 등 여러 영적인 유산을 교회와 후세에 남겼다.

 


 

 축일 9월 16일 성 치프리아노(Cypr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