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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인들의 발자취] 쿠바의 영적 아버지 성 안또니오 글라렛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7.

 

 

[성인들의 발자취] 쿠바의 영적 아버지 성 안또니오 글라렛

선교ㆍ언론사업에 전념 - 축일은 10월 24일

 

 

성 안또니아 마리아 글라렛은 1807년 스페인 「샐런트」에서 직공(職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선교지역인 쿠바에서 활동을 전개, 『쿠바의 영적인 아버지』로 불리워졌다.

비록 건강이 나빠 카르투지오 수도회나 예수회 등에 입회하지 못했지만 그는 스페인의 유명한 강론가가 되기 위해 쉴새없이 노력했다.

 

그는 10여 년간 열심한 기도생활 속에서 전교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항상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위한 신심과 성체성사 봉헌을 강조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묵주가 그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42세 때 그는 5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오늘날 글라렛회로 알려져 있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심의 선교회」를 설립했다.

 

그 후 쿠바 「산티아고」의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수차례 괴한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결코 굽히지 않고 전교사업에 열중했다.

여기서 그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교육수녀회를 창설했다.

그 후 그는 교황 비오 9세의 요청으로 스페인에 돌아와 선교와 함께 가톨릭 언론 사업에 전념하면서 종교출판사도 설립했다.

그가 저술 출판한 책들은 2백여 권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는 제1차 「바티깐」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권 교리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조국에서 추방돼 1870년 10월 24일 스페인 국경 부근인 프랑스 씨스떼르시안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그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으며 축일은 10월 24일이다.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글라렛 선교 수도회 설립

 

 

184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글라세 선교 수도회’를 설립한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주교는 자신의 신원을 ‘선교사’라고 단정짓는다.

스페인 여왕의 고해사제를 역임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옹호했던 그는 어떤 위치에 있든지 오로지 ‘선교’만이 자신의 직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글라렛 성인은 1807년 스페인의 살렌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직물 공장을 하는 아버지와 신심 깊고 인자한 어머니 슬하에서 다소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성모 신심이 깊어 묵주의 기도를 자주 바쳤다.

 훗날 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영혼의 영원성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했으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온 몸이 전율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친을 따라 직물 기술자로 성장한 글라렛은 어느 날 바르셀로네타 해안에서 거대한 파도에 휩싸여 죽을 뻔했다가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철저히 느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그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애써 모은 재산을 모두 잃고는 재물의 허망함도 아울러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겪고 글라렛은 수도자가 될 것을 결심했지만 부친의 희망에 따라 교구 사제가 되기로 하고 1829년 신학교에 입학, 1835년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글라렛의 사목 생활은 편치 못했다.

스페인 사회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이는 종교 박해로 이어져 수백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수도회들은 문을 닫았다.

 

글라렛은 이런 암흑기 중에도 작은 마을 본당 신부로서 병든 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고 설교와 교리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성소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과 탐색 끝에 자신이 선교사로 불림을 받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1839년 로마에 가서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4개월 만에 갑자기 큰 병을 앓은 그는 스페인으로 되돌아와야 했고 이듬해에 빌라드라우 주임 사제로 임명됐다.

전쟁으로 먹고 살기 어렵고 인심마저 피폐해진 그곳에서 그는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로마에까지 전해져 1841년 글라렛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당시 포교성성)으로부터 ‘성좌 파견 선교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글라렛은 카탈루냐 지방에서 7년 동안 선교 활동에 전념했다.

글라렛은 이 시기를 “나는 홀로 그리고 걸어서 다녔다”라고 단순하게 표현했지만 그 말에는 선교에 대한 그의 영성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선교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재촉 받아 홀로 걷는 사람이다.

홀로 걷기에 더위와 추위, 비바람과 태풍을 혼자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홀로 걷기에 그는 자신이 지나치는 곳곳마다 자유롭게 주님의 은총을 전할 수 있다.

 

선교사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쉼 없이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파한다. 따라서 선교사는 하느님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고 있으며 내적 가난과 무소유의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홀로 걷는 선교사, 쉬지 않고 일하는 사도였던 글라렛은 ‘가장 시급한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신념에 입각, 1849년 선교 수도회를 창립했다.

‘홀로 그러나 함께 걷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글라렛은 그가 평생 공경해온 티 없으신 성모 성심에 이 공동체를 봉헌했다.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아들인 선교사는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어야 하며 가는 곳마다 사랑의 불꽃을 피어오르게 한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수도회 창설 다음해에 그는 주교로 서품됐고 쿠바에서 선교하다가 1855년에는 ‘티 없으신 성모 수녀회(현 글라렛 선교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 후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로 추방된 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등 교회 쇄신을 위해 힘쓰다가 1870년 선종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그를 시성, 글라렛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주교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인품에 올라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의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이 알려질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께 봉사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 봉사하도록 설득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당신을 찬양하도록 일하게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 인류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게 하시고, 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이 당신 은총 속에서 사람들이 당신 은총 속에서 참고 일하게 하시어, 마침내 우리 모두가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축일 10월24일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