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11-1614년, 세 폭 제단화, 목판에 유채, 421x311cm(중앙 패널) 421x153cm(양쪽 날개), 벨기에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1610년, 세 폭 제단화의 중앙 패널, 목판에 유채, 460x340cm, 벨기에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
아기 예수를 업은 성 크리스토포로
은자
성녀 안나와 성가정’, 1630년, 캔버스에 유채, 115x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와 역동의 심포니 <박혜원>
대담하면서 균형 잡힌 구도 속 어두 운 바탕을 배경으로 붉은 기운이 도는 풍만한 여인들의 묘사와 힘차게 날뛰는 말들의 역동성이 연상되는 드라마틱한 바로크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는 렘브란트와 함께 북유럽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대가이다. 그는 화가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두 성공한 인물로, 사업가적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늘날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지겐 태생인 그는, 플랑드르의 풍요로운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의 법률가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인문주의적 고전에 정통하였으며 라틴어는 물론 스페인어, 영어 등 언어에도 능통하였다. 특히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은 그가 예민한 관계에 있었던 스페인과 영국 간의 평화 사절로서 이루어낸 업적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려한 외모와 능숙한 외교술을 겸비한 데다 역동적이며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대담한 화풍은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하였고, 그는 유럽 전역의 궁정과 교회로부터 수많은 작품 주문을 받았다. 안트베르펜에서 운영하는 공방은 그가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백여 명의 조수들이 끊임없이 작업하고 그가 마무리 작업을 하는 시스템으로 제작되어 놀라운 주문량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무려 2,000여 점에 달하는 엄청난 다작을 내어 유럽의 어느 도시, 궁전에 가더라도 루벤스의 작품을 한두 점은 만날 수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인물 묘사와 풍경에 능숙했던 그는 꽃 그림과 동물 묘사에 능숙한 얀 브뤼겔(1568-1625년 : 피터 브뤼겔의 둘째 아들로 ‘벨벳 브뤼겔’이라 불림)과 공동작업을 했다. 또 동물 묘사에 뛰어난 프란스 스나이데르스(1579-1657년)는 동물들을, 루벤스는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시스템으로 작업하여 더욱 효과적이고 우수한 수준의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외교관과 화가로서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동한 루벤스는 명성과 명예를 동시에 누린 운 좋은 인물이었다. 1598년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인 성 루카 길드에 가입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2년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동안 만토바의 곤자가 공작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에 대한 연구와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코레조, 틴토레토 등의 대가들 작품에 감명을 받았으며,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생동감이 느껴지는 르네상스 회화에 심취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화려하고 과학적인 이탈리아 화풍과 플랑드르 지방의 섬세함과 휴머니즘이 녹아든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1608년 그가 돌아와 정착한 안트베르펜은 국제적인 문화, 상업 중심지이자 스페인 지배 아래에 있던 플랑드르에서 반종교개혁의 본거지였다. 1609년 그는 인문주의자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녀는 1626년 세상을 떠나고, 53세가 된 1630년에 16세의 미모의 여인 헬레네 푸르망과 혼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1610년 그는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이는 잡화상인조합에서 의뢰한 작품으로 안트베르펜의 가장 오래된 성 와르부르 교회에 설치하려는 것이었다. 역동적인 대각선 구도로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의 근육질 몸은 고대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걸작, ‘라오콘 군상’의 드라마틱한 고통의 표현을 연상시키고 그에게 깊이 남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자들의 모습에서는 이상적인 남성 인체 표현의 극치를 보여주고 힘이 넘친다. 강렬한 빛이 비치어 유난히 창백한 백색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한 파토스적인 드라마가 연출되고 역동적인 움직임은 이 비극을 극대화시킨다.
1611년 안트베르펜의 병기제조업자 조합장이자 시장인 니콜라스 로콕스가 주문한 작품 역시 세 폭 제단화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먼저 양 날개를 닫은 모습을 보면, 왼편 날개에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은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모습이 있는데, 그는 한 손에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를 업어 강을 건너고 있다.
이는 제단화를 주문한 병기제조업자조합의 수호성인이다. 그리스 신화 속 장사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근육질의 거인 성인은 붉은색 망토를 힘차게 펄럭이며 성큼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반대편 날개에는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스승으로 노인 모습의 은자가 등불을 환히 밝혀 성인이 가는 길을 비추어주고 있다.
이 제단화를 활짝 펼치면, 역시 드라마틱한 효과를 강조해 주는 어두운 배경 속에 세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왼편 날개 부분(54쪽)에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 안에서 연출되고 있다. 온화하고 침착한 표정의 마리아는 벌써 볼록 나온 배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엘리사벳 역시 침착한 모습으로 그녀를 반가이 맞고 있다.
오른편 날개(55쪽)는 역시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기둥머리 장식의 바로크 성당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는 바로 성전 안의 광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시메온은 생전에 아기 예수를 보게 된 벅차오르는 감격에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드리고 있다. 이에 마리아가 예수를 받으려 두 팔을 뻗는 감동적인 표현이 심금을 울린다.
이 세 폭 제단화의 절정인 중앙 패널(55쪽)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모습이 절제되고 극적인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먹구름 가득한 어두운 배경 중앙에는 나무 십자가가, 그리고 그 위에는 흰색 수의를 입으로 물고 한 손으로 예수의 핏기 잃은 육신을 잡고 있는 남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옆에는 예수가 떨어질까 조심스레 손을 뻗는 남자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 화려한 복장에 붉은 모자를 쓴 사다리 위의 남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으로 한 손으로는 힘없이 늘어진 예수의 팔을, 그리고 흰 수의를 잡고 있다. 그 아래에 푸른 옷을 입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여인은 바로 성모 마리아로, 이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발의 여인이 흐느끼고 있다. 그 옆에 예수의 발을 잡고 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그녀 옆에 눈부신 붉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은 바로 예수가 사랑한 제자 요한으로 그는 예수의 시신을 받아 안고 있다. 그 옆에 사다리를 내려오는 남자는 니코데모이다. 십자가 위로부터 흐르는 눈부신 흰 수의에 휘감겨 땅으로 내려지는 예수의 축 늘어진 육신은 이미 생명의 기운을 잃은 지 오래고, 비극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이 드라마틱한 그림은 웅장한 색채의 장송곡을 들려주고 있다.
‘성녀 안나와 성가정’은 루벤스의 드라마틱한 바로크 화풍이 무르익은 1630년 작품으로, 여기서는 인위적인 극적 연출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표현이 돋보여 깊은 감동을 준다.
붉은 드레스에 푸른 망토를 두른 풍만한 성모의 모습에서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풍만함과 넉넉함이 느껴지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후에 예수가 겪게 될 고통을 예견하듯 깊은 우울이 서려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노는 아기 예수의 모습과 한쪽 가슴을 노출하고 있는 성모의 모습에서는 위엄있는 모습이 아닌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지며 깊은 감동을 준다.
루벤스가 연출해 내는 현란한 색채와 역동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회화 속 음악성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게 울려퍼지고 있다.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으며, 최근 “매혹과 영성의 미술관”과 “그림 속 음악산책”(생각의 나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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