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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 루이 다비드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0.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 루이 다비드

(1807년. 캔버스 위에 유화, 621x979cm. 파리 루브르박물관)

 

권용준

 

서구 역사는 종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중세라는 긴 세월을 지나면서 그리스도교가 서구 사회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세속군주의 힘과 권력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였다. 그런 탓에 대부분의 종교화는 교권에 종속된 군주의 이미지를 주로 다룬다. 그런데 서양미술사상 한 예외가 있다. 바로 군주 스스로 교황, 곧 하느님의 권능을 능가한다는 허망한 야심을 가졌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년)을 그린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년)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 그것이다.

 

루이 다비드는 미술사상 세밀한 관찰과 고증을 통해 실제의 사실을 그리는 신고전주의의 정점에 있는 프랑스 화가로, 나폴레옹 치하에 궁정화가를 지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혁명을 찬사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며, 그 일환이자 실재를 그리는 다비드 화풍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작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그림의 즉위식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작곡가 베토벤이 “인민의 주권을 넘겨받은 영웅도 결국 속물이었던가!”라고 탄식하면서, 나폴레옹에게 헌정한 ‘영웅교향곡’의 악보 위로 펜을 내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바로 그 대관식이다.

 

그림 중앙을 중심으로 나폴레옹과 황후 조세핀이, 그 주변으로 훗날 나폴리와 네덜란드의 왕을 지낸 나폴레옹의 형제들인 조제프와 루이가 보인다. 2층에는 ‘마담 메레’로 불리는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상원의원 비앵과 함께 있으며, 그림 왼편에는 폴린 보르게제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누이들이 있고, 조세핀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루이와 결혼한 오르탕스드 보아르네가 왕자 샤를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림 오른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두 사람은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집정관 샤를 프랑수아 레브룬과 대법관 캉바세레스로, 의전용 홀과 정의의 손을 들고 있다. 그 옆에는 의전장관이자 시종장으로 정보를 적군에게 팔아넘긴 간신 탈레랑이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가족들과 더불어 귀족과 장군, 막료들로 구성된 초호화판 대관식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교황 비오 7세와 카프라라 추기경 등 성직자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그림 구도상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형국이다. 이런 구도는 당시 나폴레옹과 로마 교황청의 불편한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로마에 입성하였는데, 혁명위원회에서 교황 퇴위의 압력을 넣었다. 이때 그는 이탈리아인들의 교황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에 매료되어 그 요청을 거부하고, 교황 비오 6세와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평화를 전제로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종교의 박해는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뒤 막강한 힘을 가진 나폴레옹은 비오 6세의 뒤를 이은 교황 비오 7세에게 불평등한 정교조약을 제안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황폐해진 프랑스를 정신적으로 재건하려면 교황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조건은 교회 재산의 몰수를 승인할 것,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파직할 것, 성직자 공민 헌장에 따라 충성을 맹세한 자를 주교로 임명할 것 등으로,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들이었다. 교황은 많은 반대에도 교회의 영적인 이익을 내세워 1801년 7월 15일 조약을 인준하였고, 나폴레옹은 77개의 부속법령을 제정하여 교회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하기에 이른다.

 

비오 7세는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자 파리에 갔지만, 독재자의 완력에 모독만 당하고 실제 소득은 별로 얻지 못했다. 성직자들을 위한 약간의 보수금, 유서 깊은 수도원 두세 곳의 재건, 그리고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 건립, 일부 수도회의 활동 인정뿐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 동안 결국 교황령은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교황청에는 연200만 프랑이 지급되었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이에 항의한 비오 7세를 1809년 7월에 납치하여 사보나와 퐁텐블로에 감금해 버린다.

 

지금 우리가 보는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황제 대관식 관례에 따라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황제의 홀을 건넨 뒤 왕관을 씌우려 할 때, 나폴레옹은 갑자기 교황이 든 관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대관을 해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조세핀에게 다가가 황후의 관을 씌웠다. 모두들 아연실색하고 경악했지만, 이 엄청난 사건 앞에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권한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이 행사를 주관하다 관을 빼앗긴 교황은 망연자실하여 스스로 자리에 물러나 앉았다. 훗날 그 모습을 스케치한 다비드의 그림을 본 나폴레옹이 “교황이 그냥 의자에서 쉬려고 멀리서 왔겠느냐?”며 다비드를 다그쳐 오른손을 들어 강복하는 장면으로 바뀐 것이다.

 

그림 오른편 위의 제단 위에는 장엄한 교황 미사의 상징인 일곱 개의 대형 촛대가 놓여있으며, 그 중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7개의 촛대는 하느님의 7일간의 천지창조의 상징이며, 중간에 있는 높은 것은 안식일의 상징으로 신앙생활 자체를 의미하는 제구이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그 등불들을 주님 앞 순금 등잔대위에 늘 차려 놓게 하여라”(레위 24,3-4). 그러나 이 등불 앞에서 벌어지는 한 독재자의 작태는 욕망과 야욕에 들뜬 인간이 쉽사리 저버린 하느님의 계명을 생각나게 한다.

 

비오 7세는 유배기간 중 독재자의 온갖 협박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그 잘못됨을 적시하였다. 그러나 교황 비오 7세는 온유한 인성에 강인한 신앙심을 가진 분이었다.

 

대관식 때 나폴레옹에게 모독을 당하고 감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지만, 그럼에도 유럽 신자들의 교황에 대한 존경심은 갈수록 높아갔고, 그가 로마로 귀환할 때는 로마 최고 귀족들의 자제가 베드로 성당으로 향하는 교황의 마차를 호송하기에 이른다. 이런 신앙심이 더욱 활기를 더하는 분위기에서 비오 7세가 교권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 신앙의 대열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압박과 굴욕을 견딘 교황이라서 그런지, 비오 7세는 백일천하를 마지막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간 나폴레옹에게 복수의 감정보다는 오히려 독재자의 선처를 바라는 등의 따뜻하고 자상한 사랑을 베풀었다. 특히 1815년 나폴레옹의 임종 시 어느 누구도 그의 곁을 지키지 않자 고해사제를 파견해서 그의 마지막 길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사랑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권력의 야망, 군대와 무기로 종교와 신앙까지 유린했으나 세속의 욕망을 향한 그 독재의 완력과 강권이 한낮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비오 7세의 강인한 신앙과 따스한 품성이 세상의 빛으로 새롭게 드러난 이 역사의 한 단편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되새기게 한다. 로마의 황제처럼 월계수관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얹고 아내에게 황후의 관을 씌우는 권력의 달콤함을 보며,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6,29)는 은혜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그림에서는 쓸쓸하고 초라한 노인의 모습으로 보인 비오 7세지만, 역사는 온갖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과 인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종교의 권위를 지키고 하느님의 위상을 저버리지 않은 비오 7세의 위대한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 이즈음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라는 바오로 사도의 진리를 가슴에 품어본다.

 

나폴레옹 뒷전, 들린 왕관을 바라보는 시저의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독재자의 허망한 욕망을 꾸짖는 역사의 질타이자, 진정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반성하게 하는 엄한 주님의 응시로 다가오지 않는가?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