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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신앙의 알레고리 / 얀 베르메르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2.
신앙의 알레고리 / 얀 베르메르

 

신앙의 알레고리 / 얀 베르메르

1671-1674년. 캔버스 위에 유화, 114.3×88.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권용준 안토니오(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1632-1675년) 는 17세기의 네덜란드의 화가로, 그이가 살았던 델프트의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뛰어난 색조,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 넘치는 그림을 그렸기에 ‘빛을 그린 화가’로 칭송받고 있다. ‘델프트의 스핑크스’로 불릴 만큼 그의 생애는 수수께끼처럼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렘브란트 다음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로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사람이다.

 

그는 작업이 매우 느린 둔필로, 현존하는 작품이라야 고작 40점 정도이며, 실제 그보다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우유 따르는 여인’이나 ‘바느질하는 여인’, ‘진주귀고리 소녀’처럼, 그가 그린 작품 대부분은 여느 가정의 소박한 일화를 따스한 필치와 은은한 빛의 효과를 통해 그린 소품들이다. 두 점의 풍경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가 남긴 종교화 가운데 하나인 ‘신앙의 알레고리’다.

 

이 그림은 그의 말년 작품으로 주제와 구도, 빛 등의 표현법이 이전의 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을 야기했으며, 베르메르의 실패작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베르메르 내면의 가톨릭 신앙을 증언한 작품으로 인정하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원래 신교도였으나 가톨릭 신자인 카타리나 포르네스를 사랑했기에 개종을 하고 그녀와 결혼한 베르메르의 종교적 신념을 이 그림을 통해 살펴보자.

 

그림 오른쪽에는 한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종교적 순결과 신앙을 상징하는 흰색과 진리를 의미하는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한 손은 믿음의 증거로 가슴에 얹고 한쪽 발은 지구 위에 올려놓았다. 이처럼 여인이 지구 위에 발을 올려놓은 것을 그림의 도상에서는 진리의 알레고리로 본다. 그리고 지구는 인간이 갖는 세속의 욕망을 나타낸다. 그러니 이 여인의 모습은 진리가 모든 세속적 욕망을 물리치고 그 우위에 서서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는 무엇인가? 그 진리의 참된 의미는 이 그림의 나머지 오브제들과 연관 지어 볼 때 환히 드러난다. 먼저 여인 옆에 놓인 탁자를 보자. 그 위에는 황금 성작이 있으며 흑단나무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는데 이는 믿음을 배우고 지키는 원천으로서 성경을 뜻한다. 또한 탁자에 걸려있는 영대는 사제를 의미한다. 그러니 이 탁자는 교회의 제대를 축소해 놓은 것이며, 성체의 기적을 묘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그림의 여인이 상징하는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세속의 욕망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참된 삶,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진리의 여인이 이 기적과 신앙의 탁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이 그 말씀을 몸소 새기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그림의 배경을 보면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1620년경에 그려진 야곱 요르단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인데, 실제 이 그림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빼고 그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진리의 여인을 그림에서 생략한 막달라 마리아가 환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임신한 모습에서 동정녀 마리아로 볼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이 여인은 강한 믿음의 알레고리임에 틀림없으며, 그 배경의 해골산이 보이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림의 전경, 격자무늬의 타일이 깔린 바닥을 보면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나뒹굴고, 그 왼편으로는 커다란 석판과 같은 돌에 짓이겨져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뱀이 한 마리 있다. 인간의 원죄와 관련된 창세기의 이야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뱀은 악이며, 돌은 악을 심판하는 하느님이다. 사과는 물론 인간의 원죄를 말한다. 뱀을 내리친 돌이 커다란 주춧돌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상징이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는 교회의 반석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악을 물리친 세상에 세워질 하느님 세상 말이다.

 

그래서인지 천장에는 유리구가 하나 달려있다. 이 투명한 유리구는 작은 구가 세상 모든 것을 담고 비출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세계이자, 천국을 흠모하고 하느님 말씀을 믿는 인간의 마음, 곧 신앙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 유리구 안을 들여다보면 이 아틀리에의 사물은 물론이지만, 방 옆의 빛이 들어오는 격자창의 문양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격자 문양이 바로 우리 신앙의 증거로서 십자가를 대신하는 만큼 하느님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여인이 짐짓 지어낸 멜로 드라마성의 과장된 표정으로 이 유리구를 응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믿음과 신앙의 세계를 알고 마음 깊이 새기는 순간이 바로 진정한 희열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 기쁨에 들뜬 눈을 보자. 세상의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이슬로만 이루어진 눈망울이다. 그리고 그 표정은 천사가 신앙의 불화살로 가슴을 찌른 순간 ‘고통의 희열’을 느끼는 데레사 성녀의 법열 그 자체로 보인다. 바로 신앙과 깊은 영성의 힘으로 살아갈 때,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벅참과 기쁨의 표징이다. 이 벅찬 순간, 순종 이외에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는 나약한 인간의 심성을 드러낸 것이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올라간 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광경은 무겁고 육중한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보이도록 되어있다. 그림의 왼편에는 복잡하게 엉클어진 채 반쯤 젖힌 거대한 융단 커튼이 빛을 받고 있으며, 그 태피스트리의 내용은 화려하게 수놓은 인간의 세속적 유희와 환락이다. 바로 진정한 신앙과 믿음은 이런 속된 삶, 내 마음에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유혹의 마음을 완전히 거두어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 말씀을 깨닫고 진정한 성찬과 영성체의 기적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강한 믿음과 신앙의 기적이 내 마음에 스미면서, 하느님을 응시하고 하느님의 세계를 흠모하고, 예수님 수난의 진정한 의미를 새기면서 다시 한 번 가톨릭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화가가 소박한 화필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그림의 구성은 위의 천국과 오른쪽의 성찬과 미사, 아래의 심판받아야할 악의 세계, 가운데의 신앙의 진리, 왼쪽의 세속의 유희와 쾌락 그리고 그림 뒷부분의 예수의 수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 각자가 이 가운데 어디를 점하고 살아가는지를 되새겨보도록 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세속의 세계는 눈에 밝게 들어오는데 신앙의 세계는 왜 이리도 어둡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더불어 가운데 진리와 믿음의 여인이 세속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지구를 발로 밟고 있는 그 심정을, 날마다 땅을 딛는 나의 발디딤 속에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내 일상에서 자신의 시선과 마음과 발로 직접 느끼는 신앙의 법열이 바로 믿음의 주춧돌임을 돌아보아야겠다는 신앙인 베르메르의 다짐을 이 그림 속에서 새삼 읽고 공감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