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탄생 / 보티첼리 (1500년. 캔버스 위에 템페라, 108.5 x 7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권용준 안토니오(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유려한 선과 감미로운 색채감을 통해 세속의 붓으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보티첼리(1445-1510년)는 성경과 신화 등 초월적 세계를 주로 그린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가이다. 특히 성경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성탄을 그린 ‘신비한 탄생’이다. 유연한 선과 단순한 형태를 비롯해 풍부하고 선명한 색채와 새로운 방식의 공간 구성법이 보티첼리 예술의 한 획을 그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유일하게 이 그림에 날짜를 명시하고 서명하였다.
이 그림은 제목의 ‘신비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특히 보티첼리는 그림 상단의 명문에서 예수 탄생을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종말론과 예수 재림에 관한 요한 묵시록과 연관시켜 그렸음을 그리스어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요한이 환상을 보고 묵시록을 쓴 바로 그 마음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묘사한 것으로, 탄생의 순간을 빌려 아기 예수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 역경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포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새 예루살렘과 예수 재림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의 주된 테마는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허술한 집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이 보인다. 성가족이 집을 비롯한 주위에 비해 더욱 크게 표현된 것이 어색하지만, 이런 과장성은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그림에 한층 신비감이 감돌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가만히 살펴보면 뭔가 상서롭지 못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먼저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말안장에 기댄 채 놓여있다. 이 말안장은 십자가 처형 전에 나귀를 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그래서인지 그 나귀의 등에 예수의 죽음과 연관된 십자가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아기 예수를 싸고 있는 흰색의 천이마치 수의처럼 보이며,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마구간이 아닌 동굴로 그린 것 역시 예수가 훗날 묻히게 될 무덤을 연상시킨다.
특히 그림 하단, 신비한 탄생의 현장에 다다르는 길이 지그재그로 난 것이 예수께서 겪어야 할 고난과 수난을 의미하는 동시에, 신앙의 길에 놓인 고된 난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 그림에서 떠들썩한 탄생의 기쁨보다는 은밀하게 젖어드는 애잔함이 느껴지는 것인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요하고 거룩한 시선에서도, 소와 나귀의 무심한 표정에서조차도 알 수 없는 잔잔한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가?
성가족 가운데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람은 요셉으로 이 위대한 기적에 눈길을 두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이 탄생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채 고뇌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한편 예수의 탄생이 아버지로서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편 가장으로서 아내의 해산을 위해 번듯한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자책이라는 겸손한 미덕을 표현한 것이다. 다르게는 요한 묵시록의 예수 재림에 관한 이야기에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반면 그림의 윗부분에는 12명의 천사들이 손을 잡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다. 몇몇은 황홀경에 빠져 구름 사이로 스미는 하느님의 황금빛을 바라보며, 몇몇은 시선을 땅에 두고 있다. 숫자 12는 요한 묵시록의 열두 개의 문을 가진 도시로 그려진 새 예루살렘과, 동정녀 마리아에 비유되는 묵시록 여인의 왕관에 달린 열두 개의 보석을 상징할 것이다. 바로 새롭게 열린 세상과 연관된 형상인 셈이다.
그 새로운 세상의 영광을 알리는 오브제가 이 그림 사방에 그려진 종려 화환과 나뭇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여왕 동정녀 마리아에게 영광을’이라는 노래가 연상되지 않는가? 또한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물고 와서 홍수의 끝을 알린 것이 올리브 가지인 것처럼, 이 나무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은 화해이자 평화의 상징이다. 이 그림이 이탈리아 혼란기에 그려진 만큼, 보티첼리는 하늘과 땅을 비롯해 인간들 간의 상호 화해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붓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구간의 지붕 위에는 세 천사가 무릎을 꿇고 책을 펼쳐 구세주의 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3의 숫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하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인 성자라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입은 옷의 흰색과 초록, 붉은색은 믿음과 희망과 자애라는 세 가지 기본 덕목을 나타낸다.
그림의 왼편에는 천사들이 종려관을 쓴 동방박사들의 예수 공현을 인도하고 있다. 이 천사들은 예수 세례 때 요한이 말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라.’라는 구절이 적힌 두루마리를 신비한 장소에 들이밀고 있다. 마기(magi)들이 예수께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당시 부패의 온상이었던 피렌체의 동방박사 신자회가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습 또한 왕의 모습이 아닌데, 그 이유는 피렌체의 유일한 왕은 예수뿐이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그림 오른편에는 한 천사가 두 목자를 예수께 인도하고 있다. 한 목자는 해진 각반에 맨발을 하고 있으며, 다른 목자는 구멍이 난 신발을 신고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곧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성탄 현장에 이들이 초대된 이유는, 예수 탄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지만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것임을 명시하려는 것이다. 이들이 들판에서 들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노래가 그림 전경의 세 천사가 든 두루마리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인간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보티첼리는 이 포옹의 장면을 통해서 성탄의 본래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성탄이란 하늘과 땅이 입맞춤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것임을 말이다. 하늘과 땅이 결합되어 구원의 길을 연 이 탄생이 얼마나 신비한가? 또한 그림 밑에는 창에 찔려 도망가는 악마들이 작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요한묵시록 12장의 말씀과 연관이 있다. 천사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악마들은 창에 찔리거나 땅 속으로 숨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악의 세력이 사라진다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이 그림은 요한 묵시록의 종말론과 예수 탄생을 함께 그리고 있지만, 종말론에 근거한 두려운 최후의 심판보다는 구원의 시작인 예수의 탄생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이 땅에 악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오리라는 희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조형적으로 볼 때, 동굴 앞 지붕과 아래쪽 사람들의 수평구도가 드러내는 평온함, 하늘의 열두 천사의 원이 나타내는 완전함과 영원함, 지붕에 세 천사와 동굴암벽 사선이 그리는 삼각형의 안정감을 통해 묘사되고 있으며, 그 완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의 가운데에는 우리 신앙의 원형인 성가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그림 속에 사랑과 화해, 평화라는 하느님의 지고하고 크나큰 영적 의지를 드러낸 보티첼리는 예수 탄생이 의미하는 신비로움을 묵상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뿌리 깊은 신앙의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다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
'<가톨릭 관련> > ◆ 성화 & 이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울의 개종 / 미켈란젤로 (0) | 2011.11.24 |
---|---|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 16세기, 이콘 (0) | 2011.11.24 |
예수 성탄 / 12세기, 모자이크 (0) | 2011.11.24 |
예수님과 12제자들 / 12세기 (0) | 2011.11.24 |
최후의 만찬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0) | 2011.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