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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롯과 두 딸 / 안트베르펜의 마이스터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9.
롯과 두 딸 / 안트베르펜의 거장

 

롯과 두 딸 / 안트베르펜의 마이스터

(1530년경. 58 x 34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죄지은 인간, 하느님께서 명하신 길을 걷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내린 하느님의 벌, 천벌은 그토록 엄하고 가혹한 것인가? 노아의 홍수가 그렇고, 바벨탑의 일화가 그러하며, 소돔과 고모라의 붕괴가 그러하다. 이런 시련은 참다운 하느님의 세상을 위해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예정된 도정 곧 하느님의 섭리인가? 이런 시련 가운데 살아있기에 더욱 힘든 신앙의 여정을 준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창세기 19장을 장식하는 ‘롯과 두 딸’에 관한 일화이다.

 

인간의 성적 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노여워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 이들의 도시 소돔을 멸망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셨다. 이 죽음과 파멸의 심판에서 인간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간곡한 간청과 의미있는 계략에도 하느님의 응징은 가혹한 것이었다.

 

도시의 타락상을 살피러 소돔에 온 두 천사를 알아본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이들에게 하룻밤 묵어가길 청하고는 맛난 음식을 준비한다. 그러나 성적 방종과 타락에 젖은 이곳의 젊은이들이 롯의 집으로 몰려와 두 손님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손님들에게 이런 무례를 범할 수 없으니 대신 자신의 두 딸을 데려가라고 하지만, 이미 쾌락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이들은 롯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쯤 되니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들을 집으로 들인 다음, 밖의 무례하고 타락한 인간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고 천사들은 롯의 가족에게 도시를 멸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는 지금 당장 도시를 떠날 것을 권유하면서,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을 명한다. 망설임 끝에 롯과 그의 식구들은 도시를 뒤로한 채 긴 여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곧바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창세 19,24-25). 이 와중에 롯의 부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비록 하느님의 심판에서 몸을 보존했지만, “세상의 풍속대로” 자신들에게 올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안 두 딸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한테서 자손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먹이고는 아버지 모르게 차례로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급기야 두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되고, 이들의 이름을 각각 ‘모압’과 ‘벤 암미’라 하였다. 이들이 훗날 모압족과 암몬족들의 조상이 된다.

 

이 그림은 16세기 안트베르펜의 거장이 소돔의 멸망과 롯의 운명을 형상화한 이른바 ‘롯과 두 딸’이다. 전반적으로 어슴푸레하고 창백한 색조로 지엄한 심판의 기운을 표현한 이 그림은 왼쪽 상단을 중심으로 유황과 불로 심판받는 소돔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쪽 하단을 중심으로는 구원의 붉은 색조를 통해 소돔에서 무사히 탈출한 롯과 두 딸을 그리고 있다.

 

멀리 하늘에서는 하느님께서 퍼부으시는 유황과 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인간의 도시는 화염에 불타고 쾌락과 유희의 상징인 화려한 건물과 믿음을 상실한 인간의 부도덕을 경계하지 못한 교회의 첨탑은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바다는 수많은 배들이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는 죽음의 바다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의 한가운데 도시의 광장은 날벼락을 피하려는 자들,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도덕하고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헛되이 구원을 원하는 가련한 인간들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고 있다.

 

멸망하는 도시 아래로는 머리에 짐을 이고 좁은 길로 짐 실은 나귀를 끌고 가는 롯의 가족이 다시금 보인다. 아무런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꿋꿋한 행보를 하는 것이 굳은 믿음과 굳건한 신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이들의 뒤로는 이미 소금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가 보인다. 이는 나약한 인간의 심성과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대변하듯 쓸쓸히 멸망하는 도시를 향하고 있다.

 

그림 전경에는 이런 믿음과 신앙의 여정 뒤에 밤을 맞은 롯과 두 딸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천막을 치고 그 위에 추위에 대비하여 불을 밝혀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큰딸은 이미 술에 취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으며, 작은딸은 자신의 차례를 위해 큰 포도주 항아리를 들어 병에 술을 따르고 있다. 아버지의 대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포도주가 준비되었는가? 큰 항아리가 3개나 된다. 그런데 취기가 오른 아버지의 품에 안긴 딸의 모습이 두려움과 긴장으로 무척 경직된 것으로 보인다. 화가는 데생 솜씨가 부족해서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포도주를 따르는 다른 딸을, 지극히 우아하고 섬세한 곡선으로 요염하고 아리땁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묘사의 차이는 비록 성경 이야기지만, 해석상 실제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으며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근친관계에 대한 화가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를 은밀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가는 인간의 도덕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지만 깊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역시 하느님의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이들의 천막 위쪽에 있는 성읍을 높고 온전하며 거룩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바로 이곳이 하느님께서 새롭게 준비하신 세상인가? 그리고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자들은 그림의 암굴로 표현된 시련의 과정을 통해야 하며, 그 위에 늠름하게 우뚝 솟은 바위처럼 굳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비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비록 근친상간이 벌어지는 장소지만, 이곳에 썩은 나무기둥과 죽은 동물의 잔해가 싱싱하고 높게 자란 나무와 함께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심판 이전의 타락한 세상은 가고, 이후 하느님께서 새로 세우실 세상 곧 악과 부패가 없는 온전한 인간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들이 가라앉는 무서운 바다가 잔잔하고 평온하게 묘사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 물과 불, 나무와 거친 바위가 조합된 이 그림 속의 풍경, 곧 심판의 격렬함과 무서움이 한없는 평온함과 침묵과 함께 공존하는 이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이런 불가해한 현상을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 이런 우리의 논리적 판단을 초월한 현상이 롯과 두 딸의 행각에 대한 인간적 해석을 경계하기 위함은 아닌가? 곧 인간의 논리로 규명할 수 없는 신비한 하느님의 예정에 인간의 판단과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는 아닌가?

 

이처럼 그림 속의 풍경과 더불어 롯의 근친 행각이 이성적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한 것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지 말고 지극한 신앙과 두터운 믿음의 길을 걸으라는 교훈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온갖 지략을 동원해 막아보려 했던 아브라함의 간곡한 사랑과 두려운 믿음과 강한 신념을 본받아, 오늘의 우리와 교회가 진실한 신앙의 길을 향해야 한다는 마음의 지표를 다시금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회심하라는 그리스도교 애초의 교리를 화가는 이 그림에 담고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