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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 제임스 엔소르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9.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 제임스 엔소르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 제임스 엔소르

(1888년, 캔버스에 유채, 260 x 431cm, 미국 폴 게티 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19세기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 1860-1949년)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기괴하고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다. 표현주의란 강렬한 색채와 기괴한 형상으로 작가 개인의 내면적이며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엔소르의 그림에서는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서정적인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흉측한 가면과 해골 등 위선과 죽음의 형상들이 강렬한 보색 대비를 통해 화면 대부분을 지배한다.

 

이런 그의 그림은 당시 화단의 이단으로 치부되어 비평가들한테 강한 혹평을 받고 전시를 거절당하는 멸시를 받는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그의 독특한 화풍을 통해 대변한 작품으로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이라는 대작이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겉옷과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위를 걸으셨다. 이때 많은 사람이 외쳤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분이 누구신지 묻는 이들에게는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라고 대답하였다(마르 11,1-11과 마태 21,1-11 참조).

 

엔소르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입성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림의 그리스도는 나귀를 타고 손을 들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두드러지게 묘사된 것도 아니고 화려한 색상으로 크게 표현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후광도 카니발의 의상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시는 자갈길 위에는 겉옷도 잎이 많은 나뭇가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이익을 담은 정치구호만 난무하는 가운데, 그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작은 글씨로 그리스도인의 일성을 적어놓았을 뿐이다. “브뤼셀의 왕이신 그리스도 만세(Vive Jesus, roi de Bruxelles).”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한 도시, 그것도 이기심과 적개심 그리고 위선과 거짓, 황금에 눈먼 자들이 난무하는 현대문명 앞에 서 계신다. 이처럼 이 그림 속에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숨어있다.

 

먼저 그리스도를 인도하는 자들은 ‘검은 벽’을 보이는 군대의 취주악단이다. 이들은 “항상 승리하는 절대적인 팡파르(Fanfare doctrinaire, toujours reussi”라는 현수막을 보인다. 이것은 이들의 행진이 그리스도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세속의 권력과 욕망을 찬미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푸른색 연단 위에서 흰색 어깨띠를 두른 시장이 이들의 이런 모습을 아첨꾼들과 함께 머저리 같은 모습으로 관전하고 있는데, 욕망으로 ‘말씀’을 망각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그린 것 같다. 이런 인간들의 허울 좋은 욕망과 위선에 호응이라도 하듯 그림의 앞부분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허세를 부리며 서로에게는 아무런 인간적 관심도 갖지 않은 이기적 존재들이 갖가지 가면형상들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윗부분의 붉고 커다란 현수막으로 여기에는 “사회주의 만세(Vive la social)”라는 정치구호가 적혀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강력한 물리적 행동에 굴복한 국가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법령을 제정했다. 그리스도 뒤편, 그 현수막 아래에서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환호는 그리스도의 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이 그림은 당시 진실을 망각한 정치상과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직접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엔소르는 당시 개인적으로 지녔던 심리와 감정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그 심리와 감정은 바로 고독이다. 경제적으로 점차 부유해지면서 인간성을 상실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인, 가족과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사내, 화단에서 소외된 고독한 투쟁자의 모습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예수를 모티프로 자신의 심정을 담아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그의 가족들이 보인다. 가운데가 어머니며 양 옆에 누이와 아버지가 보인다. 그 모습이 건조하고 아무런 인간미가 없어 괴이하게 표현되어 있다. 예술에 대한 어떤 사랑도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사회적이며 경제적 부에만 관심있는 자들의 허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특히 그가 살던 오스텐드라는 도시가 유럽 최고의 해양 휴양지로 발돋움하면서 생성된 경제적 부가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엔소르는 직접 보았던 것이다. 이런 세속적이며 헛된 욕망에 들뜬 모습을 묘사하기에 가면보다 더 적합한 모티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제 모습과 본래 마음, 곧 인간 본연의 모습과 영적 삶의 태도를 뒤로한 채 현실의 부를 중시하는, 곧 삶의 중요한 가치를 망각한 존재들을 가면과 해골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동시에 이 가면을 쓴 자들은 엔소르를 경멸하고, 그의 예술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복수의 심리로도 작용한다. 이런 자들이 입성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 그림 속 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그림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바로 홀로 계신 모습의 그리스도이다. 엔소르는 불경하게도 그리스도를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림에서 긴 머리와 턱수염은 자신의 모습이며, 실제 그가 지닌 십자가의 ‘INRI’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써놓을 정도였다.

 

이런 동일시는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인습에 찌든 채 개혁을 외면하는 벨기에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바로 절대교독을 승화시킨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군악대는 그리스도의 적, 곧 기성 체제를 옹호하면서 새로움에 맞서 싸우는 존재들이다. 엔소르에게 이들은 고정관념에 젖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를 판별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중요한 전시 참여를 금지한 평단의 예술비평가들이다. 실제 엔소르는 강렬하고 기괴한 형상 때문에 주요 전시에 출품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외로운 화가였다. 이 그림의 전면을 차지하는 군악대장이 가톨릭 주교의 형상으로 묘사된 것 역시, 새로움을 향한 자신과는 다른 관념 곧 기성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빠진 군인들과 당시 교회가 별반 다름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자신의 외로운 마음과 고독한 투쟁은 그리스도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모습과 연관이 있다. 특히 가면과 비인간적인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 엔소르는 자신의 심적 괴로움 곧 고독한 마음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는 이 혼자의 아픔을 이기려고 그리스도의 위상을 통해 고독을 이상화하며, 자신의 고독을 그리스도의 홀로 있음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한다.

 

“오직 고독하고 외로운 자, 침착하고 신중하며 인고의 삶을 산 순교자만이 예술에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미래는 고독한 자의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이 그림 이면에 스며있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