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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건초 수레 / 히에로니무스 보슈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9.
건초 수레 / 히에로니무스 보슈

 

건초 수레 / 히에로니무스 보슈

(1485-90년경, 패널에 유화, 135x10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우리는 길섶에 핀 풀의 가치가 별 것 아님을 잘 안다. 성경도 인간의 허영과 사치, 탐욕의 덧없음을 풀에 비유한다.

 

“너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 그들은 풀처럼 삽시간에 스러지고 푸성귀처럼 시들어버린다”(시편 37,1-2).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내시면 그들은 … 사라져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버립니다”(시편 90,4-6).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있으리라”(이사 40,7-8).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1코린 3,12-13).

 

세속의 욕망이 덧없는 순간의 명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괴하고 환상적이며 초현실적인 형상으로 세상에 남긴 화가와 그림이 있으니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 1450-1516년)가 그린 ‘건초 수레’(The Haywain)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 등 주로 끔찍한 죄악상을 그린 그를 사람들은 ‘악마의 화가’ 또는 ‘지옥의 화가’라고 불렀다.

 

이 그림 속에는 수많은 군중이 무질서하게 얽히고설키어 있다. 그림의 가운데는 마른풀을 잔뜩 실은 수레가 있고, 건초 위에는 싱싱한 나무가 자란다. 나무 앞에서는 세 사람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며, 그들 양 옆으로는 천사와 푸른색 악마가 보인다.

 

그리고 수레를 호위하는 의식을 치르듯 황제와 왕과 교황의 행렬이 수레 뒤를 따른다. 수레에는 많은 남녀가 엉켜있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무거운 풀 더미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손과 도구로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 한다.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인간들과 그 와중에 바퀴에 깔려버린 사람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인간의 욕망이 빚은 아비규환의 수랑장이다.

 

보슈가 살던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부를 향한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 곧 온갖 탐욕과 정욕, 범죄와 무질서가 난무한 혼돈과 절망, 어둠의 시대였다. 교회는 당시 막시밀리안 1세와 같은 황금만능의 사고에 젖은 왕과 결탁하면서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자신의 안위와 이득을 더욱 탐하는 등 점차 타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림에서 수레 뒤 위세를 떨치는 위정자 무리 속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휘장이 보이는데, 바로 막시밀리안 1세의 것이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사람들이, 미래는 밝고 희망찬 것이 아니라 흑암과 지옥과 같이 불길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시대의 선각자들인 설교자와 예술가는 이런 시대를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징후가 그림에서도 보이는데, 그림 위쪽으로 물러나 성흔(聖痕)과 함께 작게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 타락한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어찌 이럴 수 있는지 속수무책이라는 몸짓을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쯤이면 수레에 가득 쌓인 건초가 무엇일지 생각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건초더미에서 각자 쥘 수 있는 만큼 얻는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또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건초더미와 같은 많은 것을 마련해 주셨다. 그 더미를 혼자 모두 차지하려는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바보다.”라는 노래도 있었다. 이 그림 속에서 많은 인물이 조금이라도 건초를 더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행위는 인간의 무모한 탐욕과 덧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적으로라면 수레와 풀 더미가 있는 자리에는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풀 더미를 지나치게 비대하게 그린 것은 신앙과 믿음 대신 들어선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사악한 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레가 도착할 목표는 물론 최후의 심판이며 영생의 구원일 것이다. 그런데 수레를 끄는 자들을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흉측한 괴물들이다. 하나는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쓰고 등에 나무가 솟아 자라는 인간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다리와 인간의 팔 그리고 쥐의 얼굴을 한 물고기 형상이다. 이들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형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지하 악귀의 모습, 곧 사탄의 무리다. 사탄의 추종자들이 건초를 미끼 삼아 헛되고 탐욕스럽고 싸움질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특히 세 장이 쌍을 이룬 이 그림의 왼쪽은 ‘천국’이며, 오른쪽은 ‘지옥’인 만큼, 가운데 있는 이 그림의 건초수레와 주변의 욕심으로 가득한 군중은 ‘죄 없는 순결의 땅’에서 ‘죄와 단죄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악귀들의 뒤로는 지하 흙무더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나무 문을 열고 끝없이 흘러나온다. 이들은 악의 땅, 탐욕과 거짓, 살인이 난무한 세상에 발을 디디려고 욕망을 사르는 자들의 무리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세상은 이렇게 험하고 악한 것이다.?

 

그림의 아래에는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그려놓았다. 왼쪽의 키가 큰 검은 모자를 쓴 채 아이를 업고 망토를 두른 자는 떠돌이 마술사이자 도둑이다. 옆에는 집시가 보채는 아이를 돌보지 않고 한 여인의 손금을 일고 있다. 오른쪽에는 돌팔이 의사가 여자 환자를 고통스럽게 치료한다. 수녀 하나는 남근의 상징인 백파이프를 부는 악마에게 다가가고, 다른 수녀는 손에 포도주 잔을 든 뚱뚱한 수사의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다. 서원을 저버린 이들은 교회 재산을 빼돌리느라 정신이 없다. 이들의 위로는 살인의 현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인간 욕망과 달리 보슈는 희망의 전조도 표현하였다. 바로 그림 뒤편의 푸르고 풍요한 빛의 땅이 그것이다. 이곳은 주님께서 계시는 평화의 낙원이며, 우리 마음의 희망이고 안식처다. 그리고 건초 위의 음악과 사랑이 있는 곳은 역시 평화의 단물이 흐르는 곳이다. 음악 연주자와 입맞추는 남녀, 이들의 애정행각을 엿보는 이가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을 보여준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성체를 받는 은총이며, 그 은총의 기쁨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입맞추는 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늘 사탄의 유혹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오른쪽의 푸른 악마가 트럼펫을 크게 불며 성스런 음악연주를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인간을 보호하고 은총을 내려달라는 반대쪽 천사의 애원이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로 구원이라는 교회의 사명을 암시한다.

 

이처럼 기괴한 형상으로 가득찬 보슈의 ‘건초 수레’는 악이 난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인간 세상과 인간의 탐욕을 경고하며, 동시에 인간이 추구하는 물질적 욕망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신앙과 사랑, 가난이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얼마나 큰 미덕인지를 마음 깊이 되새겨주는 그림이다. 새해 벽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본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