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樂의 묵주기도 성모 / 우석 장발 화백
45년만에 세상 속으로 성미술 선구자 우석 장발 화백 희귀작 공개
▲ 45년 만에 빛을 보는 장발 화백의 미공개작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 '김대건 신부'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등 기존 대표작보다 토착화 열정 및 회화적 표현 욕구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미술가들 평이다.
한국 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성미술 선구자인 우석(雨石)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의 희귀작 '칠락(七樂)의 묵주기도 성모'가 45년 만에 공개됐다. 유화 작품인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88㎝×128㎝)는 장 화백 화풍상 구상 표현의 마지막 시기에 제작한 것이라 완숙도가 뛰어난 데다 구성과 형태, 토착화 등 여러 면에서 화단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은 독실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었던 장 화백이 1963년 제작, 1965년 서울 정동 작은형제회 수도원 축복식 때 봉헌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회 측은 작품의 진가에 대한 이해 없이 그동안 줄곧 수도원 봉쇄구역 1∼2층 중간 계단 벽에 걸어뒀다. 봉쇄구역은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지역이라 가톨릭 미술계는 물론 장 화백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작품의 존재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모성월에 빛을 보게 돼 더욱 뜻깊은 이 작품은 예수 잉태부터 승천에 이르는 성모 마리아의 7가지 기쁨을 되새기는 프란치스칸 고유의 묵주기도를 표현한 것이다. 칠락 묵주기도는 성모 마리아가 1442년 한 수련자에게 성모로서 누린 7가지 기쁨을 일러주고 "성모송으로 화관(花冠)을 엮으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작가는 하늘에 올라 천상 모후의 면류관을 쓴 성모 마리아(제7락)를 가운데 두고 예수 잉태ㆍ엘리사벳 방문ㆍ출산ㆍ부활하신 예수를 만남 등 나머지 기쁨의 순간을 좌우 양측에 형상화했다. 또 천상의 모후를 조선시대 궁중의 왕비처럼 표현하고, 성전에서 만난 아들 예수에게 복건(幅巾) 씌우는 등 한국 고유의 색과 정서로 성모의 기쁨을 표현해 교회미술 토착화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제2공화국 총리 장면 박사의 동생인 작가가 5ㆍ16 군사 쿠데타 후 정신적 고통이 심할 때 그린 그림이라 그의 내면적 신앙세계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김주삼(루치아노) 실장은 "장 화백은 한국교회 성미술의 선구자이자 원류(源流)지만 국내에 작품이 몇 점 남아있지 않은 데다, 이 작품은 특히 구성과 완숙도 면에서 가치가 높아 공개 의미가 크다"며 "먼지가 쌓이고 약간 퇴색됐지만 유화 특성상 상태도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작은형제회는 모사품을 제작해 계단 벽에 걸어두고, 원본은 복원작업을 거쳐 수도회 역사박물관에 보관할 계획이다. <평화신문>
장발 화백의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 공개
인물들의 초월적 자세 가장 원숙하게 표현
우석(雨石)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의 '칠락(七樂)의 묵주기도 성모'는 기나긴 세월을 성화 제작에 바친 작가의 화업을 대표할만한 작품이라 비상한 관심을 끈다.
우석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김대건 신부', '14사도',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보다 조형미와 회화적 표현 욕구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대체적 평이다.
우석은 제2공화국 총리 장면(요한) 박사의 친동생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1963년은 형 장면 박사가 5ㆍ16 군사 쿠데타(1961년)로 실각한 뒤 일가족 모두 군사정권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우석은 이 작품을 완성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떠나 고국과 단절된 채 추상적 표현주의 경향의 그림을 그렸다.
▲ 장발 화백의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
우석의 화풍은 보이론 미술과 나비파 영향을 받은 구상(1920∼1940년대)→서체적 추상 표현주의(1964년 도미 이후∼1970년대)→독자적 성화의 세계(1980년대 중반 이후) 흐름을 보인다. 그러니까 추상 표현주의로 접어들기 직전의 작품으로 이전에 추구했던 인물들의 정적인 자세와 초월적 분위기, 장식적 채색이 가장 원숙하게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김주삼(루치아노) 실장은 "기존 작품들에 비해 완숙도와 조형미 등 작품성이 돋보인다"며 "특히 우석이 독실한 프란치스칸으로서, 성모님의 생애와 기쁨 속에서 정치적 혼란기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찾으려 한 점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석의 제자 최종태(요셉) 교수도 "정신적 고통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을 시기에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놀랍다"며 "우석은 한국교회에 토착화 개념도 없던 시절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한복으로 갈아 입히셨는데,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더욱 반갑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성미술 토착화 측면에서도 연구가치가 높다. 서양문물을 무조건 수용하고 높이 평가하던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의 부처를 연상케 하는 성모 마리아와 전통 채색으로 화면을 구성한 용기가 범상치 않다. 또한 초록색이 감도는 다소 엄격한 얼굴과 인물 양 옆에 이야기를 배치한 구성에서 전통 이콘화 기법도 엿볼 수 있다.
▲ 제1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 제2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 제3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 제4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동방박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심을 묵상합시다.
▲ 제5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되찾으심을 묵상합시다.
▲ 제6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 제7락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님, 기쁨 중에 하늘에 올라 천상 모후의 면류관을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우석 장발 화백은
19살에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제작한 우석은 한국의 첫 성미술가로 불린다. 명동대성당 제대 뒤에 있는 유명한 벽화 '14사도상'(1925년)이 그의 작품이다. 우석은 또 1960년 서울 혜화동성당 신축공사 때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설계와 조각 제작을 총지휘했다. 건축미가 빼어난 혜화동성당은 서양 선교사 도움 없이 한국인 건축가와 미술가들 손으로 지은 최초의 성당이다.
우석의 열정적 신앙과 창작활동에는 프란치스칸 사상이 내재돼 있다. 우석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형 장면 박사와 함께 재속 프란치스코회(재속3회)를 창립했다. 평신도의 복음적 생활실천과 프란치스칸 영성전파에 힘쓰면서 '세상 속 수도자'의 삶을 추구했다. 우석은 1953년부터 61년까지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서구식 미술교육의 틀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예술은 진리 탐구의 일환"이라는 그의 예술교육 이념과 교육 체계는 이후 전국 미술대학의 기본 틀이 됐다.
교회 미술가들은 "우석이 5ㆍ16 쿠데타로 고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한국 교회미술과 서양화단은 눈부시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우석의 12살 아래 동생 장극은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한 세계적 항공 공학자다. 누이동생 장정온은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초대 원장 수녀다. 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선구자의 고독을 안고 백수(白壽)를 넘긴 우석은 2001년 4월 8일 미국 맨해튼 피츠버그 자택에서 숙환으로 선종했다.
[평화신문, 제970호(2008년 5월 18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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