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 카라바조 (1599년, 캔버스에 유화, 144 x 195cm.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성경을 토대로 역대 화가들이 그린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주인공’ 하면 요염한 춤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살로메와, 도망치는 팔레스타인의 패장 시스라를 유혹해서 천막 말뚝을 머리에 박아 복수한 야엘, 그리고 홀로페르네스에게 죽음의 일격을 가한 유딧이 있다. 이 여인들은 모두 아름답고 요염한 미모로 뭇 남성들을 죽음의 파멸로 몰고 간 이들로, 일명 가혹한 숙명의 여인, 곧 ‘팜므 파탈’로 불린다. 이 가운데 구약성경의 “유딧기”에는 자신의 외모를 담보로 하고 자신의 정절을 희생하면서 민족을 구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유딧이다.
홀로페르네스가 이끈 잔혹하고 야만스런 아시리아 군대가 평화롭던 유다의 도시 배툴리아를 침략하고 이 도시를 철저히 유린하였다. 남자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했으며, 모든 재산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보다 더욱 잔인한 것은 야훼 하느님 대신 자신들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를 숭배하도록 강요한 일이다. 인명과 재산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짓밟힌 채 멸망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귀족 출신의 과부로 빼어난 용모를 지닌 유딧이 조국과 민족을 구하겠노라고 홀연히 나서게 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미끼로 적장을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급기야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채 적진으로 가서 적장을 만나고, 그를 유혹하여 광란의 술파티를 주관하게 한다. 술과 육체의 욕정을 맘껏 불사른 홀로페르네스.
“홀로페르네스는 술에 잔뜩 취하여 자기 침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 그때에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침상 곁에 서서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모든 권세의 하느님이신 주님, 이 시간 예루살렘의 영예를 위하여 제 손이 하는 일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맡에 있는 침대 기둥으로 가서 그의 칼을 집어 내렸다. 그리고 침상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털을 잡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힘을 다하여 그의 목덜미를 두 번 내리쳐서 머리를 잘라내었다. … 잠시 뒤에 유딧은 밖으로 나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기 시녀에게 넘겼다. 여종은 그것을 자기의 음식 자루에 집어넣었다”(유딧 13,2-10).
이 사건 이후 아시리아군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고, 유다의 도시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유딧은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채’ 나라와 민족을 구한 애국호걸로 추앙받게 된다.
“‘그대는 예루살렘의 영예고 이스라엘의 큰 영광이며 우리 겨레의 큰 자랑이오. … 그대가 전능하신 주님께 영원히 복을 받기 바라오.’ 그러자 온 백성이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유딧 15,9-10). 이렇게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했다. 이로써 커다란 칼과 잘린 머리는 유딧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으로 종교적 애국심과 다른 한편 요염한 여인의 달콤한 유혹이라는 에로티시즘이 어울린 이 이야기는 당연히 역대 많은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다. 지금 이 그림은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한 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 카라바조(1573-1610년)가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물론 성경의 이야기를 따르고 있지만, 하녀만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유딧의 옆에서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다. 그녀의 검은 피부와 깊은 주름이 유딧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이런 강렬한 빛과 음영의 대비 효과가 서구의 바로크를 이끌게 된 조형성이다.
역대 예술가들은 유딧을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려고 살인이 진행 중인 과정, 피가 목에서 분사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죽임을 당하는 자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칼로 잘리는 그의 머리는 몸통에 절반쯤 붙어있다. 눈은 완전히 감기지 않은 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전히 생기를 보인다. 그리고 그의 입은 고통스런 비명에 벌어져 있다. 단말마의 고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반면 이런 잔혹한 행위를 자행하는 유딧의 얼굴에는 어떤 승리감이나 열정도 없다. 다만 적에 대한 혐오와 반감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 역겨움 때문인지 될 수 있는 대로 희생자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태도를 취하면서, 무방비 상태의 적장을 제거하고 있다.
당시 교황령은 불이 되었건 칼이 되었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교를 처단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가톨릭 개혁의 시기이다. 가톨릭교회는 16세기 초에 상실한 지배권을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과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이 루터와 칼뱅,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을 추종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교황청에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딧이 내민 칼날은 가톨릭 권위 수호를 위해 프로테스탄트와 더불어 하느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에게 가하는 일격과 다름없었다. 바로 준엄한 하느님의 심판과 더불어 가톨릭 내부의 단호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죽음의 일격을 가하는 사람은 정숙한 미망인으로 명망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런 여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하느님의 계율을 어기는 것 역시 큰 죄악이다. 이런 세속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위험을 강조하기 위함인가? 카라바조가 유딧의 모델로 세운 사람이 레나라는 여인이다. 이 여인은 한때 화가의 정부이기도 했으며, 훗날 거리의 창녀로 전락한 사람이다. 실제 당시 로마는 순례자나 교회 봉사자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거대한 도시로 그 뒷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에게 세속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그림에 묘사된 유딧의 의미이다. 그리고 용맹한 장수로 커다란 몸집과 무예를 갖추었음에도 한 순간의 실수로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홀로페르네스는 신앙을 부정하고 주님의 계율을 어기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유딧 옆에서 음식 자루를 꽉 쥐고 있는 하녀의 모습을 보면, 이 심판의 광경을 증언이라도 하려는 듯 응시하는 눈과 이 순간의 격렬한 각오를 다지듯 꽉 다문 야무진 입에서 늙고 힘없는 여인일지라도 하느님의 계율을 지키고 실행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품어 나오고 있다.
희한한 일은 죽어가는 희생자의 얼굴이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이다. 카라바조의 삶은 실제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는 많은 폭력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결국 살인죄로 방황하다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기인 화가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이 그림 속 죽음을 맞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반영한 것이다. 이런 죽음을 맞는 자신의 모습은 죄를 씻고자 한 회개일까? 아니면 죽음에 직면한 모습이 가장 진실하다는 믿음의 표현일까? 여하튼 세속의 때에 지독하게 찌든 자신을 그렇게 하느님 앞에 바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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