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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수태고지 / 디에릭 보우츠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4.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1450-1455)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1450-1455)

디에릭 보우츠(Dieric Bouts, 1415-1475)

 

지영현 신부 (가톨릭미술가협회 지도신부)

 

디에릭 보우츠는 네덜란드 화가로, 동시대 화가인 로히에 반 데어 웨이덴(Rogier van der Weyden)과 함께 수학하여 그의 영향을 받았기에 초기 작품에 상징적인 제스처를 통한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이 많습니다. 이 작품 ‘수태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경은 넓은 내부 구조, 짙은 붉은 색 커튼이 드리운 침대, 나무로 짜인 작은 앉은뱅이책상과 기도서 같은 책이 전부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는 중에 천사 가브리엘이 붉은 커튼을 젖히며 나타나,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리라고 예고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라 당황하며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28-34)”라고 답합니다.

 

보우츠는 이 긴박하고 긴장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향해 돌아앉지 않았습니다. 비스듬한 자세로 눈은 아래를 향한 채 손을 들어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냅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는 커튼을 젖히고 한 손가락을 세운 채 매우 경건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을 취합니다. 여기서 커튼을 젖히는 것은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계시를 나타냅니다. 또한 보우츠가 표현한 수태고지의 모습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와 같은 작품에서처럼 천사와 마리아가 서로 마주보며 대화하는 모습, 천사와 마리아가 진솔하고 깊은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아닙니다. 대신 천사 앞에서 마리아는 천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떤 대화도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마리아의 인간적 고뇌와 긴장을 심오하면서도 심도 있게 드러내는 동시에, 이 침묵 속에서 거룩하고 역동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이 거룩한 침묵의 대화에서 천사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이렇게 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