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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성화로 보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4.
성화로 보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화로 보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교회 반석 베드로, 양떼 앞엔 연민... 죽음 앞엔 초연

 

2월 22일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이 날은 예수가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선택해 온 세상의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고, 지상의 대리자로 삼은 것을 기념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 바오로 사도 개종축일과 함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해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과 '성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제단 양 쪽에 즐겨 배치했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카라바조와 귀도 레니의 '성 베드로 사도 순교' 두 작품을 감상하며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의미를 알아보자. <사진 자료제공=한국교회사연구소>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마태 16,13-19)처럼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며 기초이고, 구심점이다. 예수는 이 날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너를 초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 △하늘 나라 열쇠를 주겠다 △매고 푸는 권능을 주겠다는 3가지 약속을 했다.

 

이 약속은 예수가 부활한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 특별히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 15-17)며 사목권을 부여하는 장면에서 성취됐다. 베드로는 이로써 '목자들의 으뜸'(1베드 5,4)으로서'그리스도의 양떼'를 보호하고 사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1베드 5,2-3).

 

같은 장소에서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의 순교를 예언하면서 "나를 따르라"(요한 21,19)고 촉구했다. 이 말은 예수를 대신해 양떼를 돌보듯이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도 동참하라는 뜻이었다. 베드로는 십자가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완성했다.

 

17세기바로크 미술의 선구자인 이탈리아 출신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파울리나 경당의 벽화에 영감을 받아 1601년 유화 작품 '성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완성했다. 로마 산타마리아 데 포폴로 성당 제단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망원렌즈로 포착한 현장 사진처럼 사실적이다. 카라바조는 극단적 명암대비를 사용해 극적 효과를 높이는 '테너브리즘'의 창시자답게 배경 전체를 어둡게 표현해 미동도 허락치 않는 긴장감을 안겨준다. 그림의 등장인물은 십자가에 못박힌 베드로와 3명의 집행관뿐. 카라바조는 지극히 단순한 구도에서도 관람자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등장인물 중 베드로의 얼굴만 드러나도록 했다. 3명의 집행관들은 죄없는 베드로를 처형하는 일이 내키지 않은듯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고개를 떨군채 묵묵히 형을 집행한다. 집행관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베드로를 거꾸로 매달고 있다. 테르뚤리아누스 교부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고 집정관에게 "나는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를 돌려서 내 머리가 아래로 오도록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형집행이 막 시작된듯 하다. 구덩이를 판 삽을 쥐고 있는 집행관의 발바닥에 묻은 흙이 아직 젖어 있다. 큰 쇠못이 박힌 베드로의 양 손과 발은 아직 피가 흐르지 않아 깨끗하다. 가장 건장해 보이는 집행관은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앞으로 상체를 숙인채 십자가를 묶은 외줄을 양손으로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바로 뒤 중년의 집행관은 무게중심을 뒤로한 채 양손으로 베드로의 양 다리와 십자가를 감싸고 십자가를 곧추세우며 거들고 있다. 깊이 패인 미간의 주름, 금방이라도 터질듯 부풀어오른 팔근육이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다는 집행관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맨 앞 어깨로 십자가를 밀고 있는 가장 어려보이는 집행관은 베드로를 매단 십자가가 바로 세워지기만 하면 재빨리 구덩이를 다지고 자리를 뜰 기세로 삽자루를 불끈 쥐고 있다.

 

벗어진 이마에 수염까지도 백발인 베드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머리를 들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스승 예수를 따르기 위해 거꾸로 매달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베드로가 마지막까지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교회'다. 베드로가 돌보던 그리스도의 양떼는 이제 갓 태어나 겨우 걸음마를 하는 힘없는 어린 양들이었다. 목자 잃은 양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십자가형 고통마저 잊은 듯한 베드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잘 우는' 베드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슬픔에 빠져'있고, '눈물을 흘렸다'는 등 그의 인간적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카라바조는 베드로의 젖은 눈을 통해 그가 '삯꾼이 아니라 착한 목자'(요한 10,11-13)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듯하다.

 

카라바조가 '성 베드로 사도 순교'작품을 통해 '하느님 백성'과 세상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표현했다면, 제2의 라파엘로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 화가 귀도 레니(1575~1642)는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 '으뜸 사도'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적극 동참하는 용맹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귀도 레니의 '성 베드로 사도의 순교' 작품에도 카라바조의 작품처럼 사도 베드로와 3명의 사형 집행관이 등장한다. 베드로와 집행관들의 옷색깔도 똑같다. 하지만 레니는 베드로가 아닌 주변인들을 중심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레니의 작품에서 집행관들은 얼굴을 드러내 놓은 채 일을 즐기듯 당당하다. 따라서 베드로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카라바조가 베드로의 시선을 통해 사람들을 순교의 현장으로 동참시켰다면, 레니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모두 엇갈리게 분산시켜 순교 현장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구경꾼으로만 머물게 하고 있다.

 

레니의 집행관들은 카라바조의 집행관들과 달리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사다리를 타고 십자가 위로 올라온 빨간 모자의 집행관은 왼손으로 베드로의 오른 발에 쇠못을 고정시킨 채 오른 손으로 허리춤에 찬 장도리를 빼어내고 있다. 그 아래 빨간바지의 집정관은 베드로의 양발을 묶은 밧줄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힘껏 당기고 있다. 맨 앞의 집행관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베드로가 꼼짝 할 수 없도록 허리춤을 꽉 붙잡고 곧 베드로의 살을 꿰뚫을 쇠못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 양팔만은 자유로운 베드로 사도는 부자유스럽게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손을 뻗은 채 마지막 기도를 하는 듯 하다. 벗겨진 이마에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잔주름만 어렴풋이 보일 뿐 그 어떤 두려움과 고통의 일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이겨낸 초인적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 장면에서 착한 목자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5-18).

 

[평화신문, 제8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