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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무화과나무의 비유 - 리베랄레 다 베로나

by 파스칼바이런 2016. 3. 10.

무화과나무의 비유 - 리베랄레 다 베로나

채색필사본, 15세기 경, 피꼴로미니 도서관, 시에나

 

 

 

 

[말씀이 있는 그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화가이자 채색필사본가였던 리베랄레 다 베로나(Liberale da Verona, 1445년경-1530)는 15세기 후반에 현재 시에나의 피꼴로미니 도서관에 소장된 악보집을 세밀화로 그렸다. 엄숙하고 섬세하며 기품 있는 선율의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적 요소가 담긴 악보집은 13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시에나 주교좌 성당을 위해서 여러 화가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각 장의 첫 글자는 성경 말씀의 이미지와 함께 정교하고 세련된 장식으로 악보와 조화를 이룬다.

 

알파벳 ‘O’자 안에 그려진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모두 와서 경배하세(Venite Adoremus)’라는 악보 위를 장식한 장면이다. 성금요일 전례 때 사제는 자색 보로 가려졌던 십자가에서 보자기를 벗기면서 ‘보라 십자 나무(Ecce Lignum)’를 노래한다. 이에 화답으로 신자들은 ‘모두 와서 경배하세’를 한 후, 십자가 경배가 이루어진다.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에 경의를 표하고,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한다.

 

그림처럼,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의 과수원에서 흔한 일이었다. 가정마다 한 그루씩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무화과나무는 봄에 새잎이 퍼지면 녹색의 작은 열매가 생기고, 심은 지 3년이 지나면 영양이 풍부한 맛 좋은 과일을 수확할 수 있다.

 

‘O’자 가운데의 커다란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잎을 자랑하듯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는 달려 있지 않다. 열매인 무화과만을 필요로 하는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존재 가치가 없다.

 

무화과나무 옆의 두 사람은 나무의 소유자와 그것을 가꾸는 포도 재배인이다. 왼쪽에 나무 주인은 3년이 지나서 열매를 따려고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로 판단하여 농부에게 찍어 버리라고 요구한다. 나무 주인은 오른쪽 손가락으로 농부의 손에 들려 있는 도끼를 가리키며, 지금 당장에라도 도끼로 잎만 무성하여 땅의 자양분만 빨아먹는 이 무화과나무를 베어 버리라는 강한 동작을 보인다. 농부는 왼손을 휘저으며 올해만 기다려주면, 자신이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 보살필 것을 약속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이시고, 무화과나무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애틋한 사랑으로 인내심 많은 농부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3년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키웠다. 하지만 농부는 주인께 나무에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한 해를 더 간청하고, 열매 맺지 못하면 나무를 찍어 버리기로 한다. 농부의 보살핌으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비록 잎은 이토록 무성하지만 다음 해에 베어지고 말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이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포도 재배인은 일 년 동안 주어진 시간 안에서 주인을 기쁘게 할 맛 좋은 무화과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돌보는 이는 그 열매를 먹고 자기 주인을 보살피는 이는 존경을 받는다.”(잠언 27,18)

 

[2016년 2월 28일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