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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성화에 얽힌 이야기] 로레토(Loreto)에서 성 크리스토포로를 만나다

by 파스칼바이런 2016. 3. 28.

로렌조 로토의 성 크리스토포로, 성 로코, 성 세바스티아노

 

[성화에 얽힌 이야기] 로레토(Loreto)에서 성 크리스토포로를 만나다

 

 

1년 넘게 준비해온 <한·이 현대조각전>을 7월 중순 밀라노에서 개최한 후 2주 정도 성지순례를 하기로 계획했다. 나와 조각가인 남편 한진섭 요셉은 예약해 놓은 렌터카를 받기 위해 공항의 데스크를 찾아갔다. 그런데 한국면허증이 있어야지 국제면허증만 가지고는 차를 빌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20킬로그램짜리 여행 가방을 4개나 들고 있는데 말이다.

 

하늘이 노래졌다. 화도 치밀어 올랐다. 모든 것이 어긋난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을 순례하려면 차는 필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짐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 이것들을 끌고서 기차여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늘 그러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이번에도 우리의 육신이 편한 것을 원치 않으시는구나.’

 

주님은 늘 육신의 고달픔에 비례하여 은혜를 주시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순명하기로 마음먹으니 겨우 진정이 되었다. 전시 때문에 일이 너무 많아서 목적지를 정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이탈리아 동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계획만 세웠으므로 우리는 그저 주님께 몸을 맡기기로 했다. 결과는 놀라워서 나의 저서 『명화로 읽는 성인전』에는 소개를 했으나 직접 보지 못한 작품들과 성지를 여러 곳 순례할 수 있었다. 이로써 나는 내 책에서 언급한 성지를 거의 다 순례하는 특은을 받게 되었다. 그중 오상의 비오 성인이 사셨던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와 성녀 젬마가 사셨던 루카(Lucca)를 방문했을 때는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내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성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로레토(Loreto)라는 도시를 알게 된 것도 큰 은총이었다. 로레토는 예수님과 성모님과 성 요셉이 사셨던 나자렛의 집을 천사들이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로레토 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경이었다. 작은 마을이고 시간도 늦어서 택시가 없었다. 우리는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이르자 계단이 시작되었다. 성지는 저 높은 산꼭대기에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두 팔에 짐을 들고 땀을 비오듯 쏟았다. 올 여름은 이탈리아도 연일 40도가 넘었다. 올라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있었는데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정상에 다다랐다.

 

로레토 대성당은 예수님의 어릴 적 집 위에 지은 웅장한 르네상스 식 건축물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이 각 지방의 깃발을 들고 도시를 한 바퀴 도는 행렬이 있었다. 휠체어를 탄 많은 환자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순례자들은 촛불을 들고 행렬을 했는데 우리도 그들 속에 끼었다. ‘다들 촛불이 있는데 나만 촛불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한 수녀님이 촛불을 주고는 잽싸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내 마음을 읽으신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로 생각되었다. 그날 우리는 허름한 여관에 들어갔는데 여관집 주인은 우리에게는 특별히 에어컨이 있는 방을 주겠다고 했다. 여행 중에 만난 또 한 분의 천사였다. 그날 밤 에어컨이 없었다면 아마도 밤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늘 수호천사를 보낸다는 것이다. 천사는 날개가 달린 그림 속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있는 그 누군가인데 그를 알아보려면 촉각을 예민하게 작동시키고,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내 앞의 천사를 그냥 지나쳤던가.

 

로레토에서의 마지막 천사는 다음날 아침 박물관에서 만났다. 박물관을 나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로렌초 로토라는 화가의 도록이 눈에 띄었다. 이 화가의 대표작 <성 크리스토포로>가 있는지 혹시나 하여 물어봤더니 그녀는 나에게 그림이 있는 곳 가까이까지 데려다 주면서 로토가 말년에 이 도시에서 살다가 세상을 떴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로써 나는 내 책에서 소개한 또 한 점의 그림을 우연히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 그림은 로토의 대표작이자 성 크리스토포로를 그린 그림 중 으뜸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여행의 수호성인으로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던 엄청나게 큰 거인이었다. 어느 날 한 아기를 어깨에 메고 가는데 너무나 무거워서 “너를 메니 온 세상을 짊어진 것 같구나.”라고 말했더니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응하지 않고 순교했다. 이 그림을 실제로 보니 2미터가 훌쩍 넘는 대작인 데다 르네상스 회화 특유의 인체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가 하면 휘날리는 붉은 망토까지 있어서 그림에 생동감이 넘쳤다.

 

[평신도, 2015년 가을호(VOL.49), 고종희 마리아(한양여자대학교 실용미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