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에
얽힌 이야기] 미켈란젤로, 인류의 탄생과 종말을 그리다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화(부분)>
1508-1512,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오랜
노고의 탓에 내 목에는 혹이 하나 생겼다.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수염은 하늘로 거꾸로 솟았고, 배는 턱을 향하여
불쑥 내밀고 있다. 그리고 가슴은 비둘기 가슴처럼 돼 버렸다.
물감은 내 얼굴에 흘러서 모자이크를 만들었다.”(롤랑
p. 94)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조각가가 채석장에
가서 돌을 직접 채석했다는 이야기는 미켈란젤로 말고는
들은 적이 없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조각하기 위한 대리석을 확보하기 위해 8개월 동안 까라라의
채석장에서 지내며 인부들과 함께 생활했다. 돌을 채석하는
일도 힘들지만 그것을 우마차로 끌고 항구까지 옮기는 일,
배편으로 로마까지 운송하는 일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일이어서
아무리 조심해도 도착해보면 돌이 깨져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무덤 조각을 만들 돌이 로마에 도착했는데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무덤 조각 대신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라고 했다. 거대한 기념비를 만든다는 기대감에 그
어려운 채석장 생활도 견딘 것인데 갑자기 경험도 없는
천장화를 그리라니 미켈란젤로가 겪은 절망과 분노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며 그토록 거부했던 천장화를 그는 결국 완성했고,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작이 되었다. 그는 4년
동안 물감 개는 조수 한 명만 데리고 7층 높이의 비계 위에
올라가서 마른 빵으로 식사를 하며 홀로 작업을 했다. 오랫동안
장화를 벗지 않고 지내는 바람에 발이 장화에 달라붙어서
장화를 벗기 위해 칼로 살을 베어낼 때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천지창조>로 알려진 이 천장화의 완성
후 그의 시력은 나빠졌고, 편지를 읽을 때에도 한동안 누워서
읽어야 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30년 후 미켈란젤로가 60대의 노인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시스티나 경당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는
주문을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받았다. 이 일 역시 맡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으나 피할 도리가 없었고 4년간의 외로운
작업 끝에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린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인간과 우주의 창조와 인류의 종말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두 점의 작품이지만 규모로 보면 다른 작가의 작품 수십
점을 모아놓은 것 이상이다. 이 거대한 두 작품을 작가가
극구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류의 시작과
종말이다. 다른 곳이 아닌 교황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경당에 이 같은 주제를 갖고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술사적으로
보면 이들 작품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정점이자 당시의
양식이나 개념을 완전히 초월하여 새로운 역사를 쓴 걸작이다.
오늘날 미켈란젤로가 받고 있는 칭송은 조각보다는 오히려
이 두 점의 그림 때문일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엄청난
대작을 그리기 위해 수년간 작업하면서 하느님을 만났을
것이다. 규모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양식사적 의미로보나
한 인간의 작업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글에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고 혼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절망 속에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늘 함께하였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평신도,
2015년 겨울호(VOL.50), 고종희 마리아(한양여자대학교
실용미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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