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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23주일

by 파스칼바이런 2020. 9. 7.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23주일

‘나와 너’의 친밀함, ‘영원한 나’의 현존

가톨릭평화신문 2020.09.06 발행 [1579호]

 

 

 

구요비 주교

 

 

학적인 통설에 의하면 10만 년 전 이 지구 상에는 최소 6종류의 인간 종(種)이 살고 있었는데(예컨대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 크로마뇽 등) 그중 현재의 인간종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만이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 생존의 이유 중 하나로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 문화’가 있어서, 뒷담화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 자기들의 생존력과 생존 영역을 넓히고 발전시켜 왔다고 진단합니다.(「사피엔스」 42~60쪽)

 

여러분은 뒷담화 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뒷담화란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면서 나중에 뒤에서 비판하고 욕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수다를 의미하는데, 부정적인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뒷담화 문화 안에도 소통, 친교, 대화라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순기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당신 제자들의 삶의 모습에서도 소통과 대화가 강조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마태 18,15-17)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대화의 하느님이십니다.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로 대해 주심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늘 “나 야훼가 너 이스라엘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너’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너’를 통하여 구체적인 개인인 ‘나’에게 말씀을 전하시길 원하신다는 뜻이겠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친밀함이 있을 때 그 뒤에는 ‘영원한 나’가 현존한다”고 통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 주심으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우리가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언제든 어떤 처지에서든 대화의 문을 열어 놓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까지 범한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증오하지 않고,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