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글 너머의 사랑, 삶, 그리고 살덩이 - 요한 2서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짧디 짧은 편지다. 짧은 것은 단순하고 단순하여 때론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13개의 절로 구성된 요한 2서는 종이와 먹으로 쓰여지는 편지가 아니었다.(12절) 얼굴을 맞대고 진지한 사랑을 전하고픈 마음이 고작 13개의 절로 마침표를 찍는 건, 감히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마음의 애절함 때문이 아닐까. 요한 2서를 앞에 두고 글이란 걸 끄적이는 나 역시 어지러운 단어의 편린들 사이에서 방황하고야 만다. 말은, 글은, 단어들의 엉성한 뭉치 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야 만다. 뱉을 말이 없고, 쓸 글이 없다. 요한 2서는 말과 글보다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글로 적어 놓으며 다시 곱씹는 사랑의 계명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고, 그 익숙함은 ‘부인’으로 상징되는 지역 교회들의 현실적 삶 안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된다.(5-6절) 지난 시간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도 유효한 것은 오로지 ‘부인’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 살아가기 때문이었다.(4절)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하나로 조우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자녀들의 삶, 그것 덕분이었다.
삶, 그것도 지금 여기서의 삶은 비껴가거나 회피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정언명령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기약하는데 익숙하다. 지금 여기에 육화하지 못한 채 우리의 마음은 가상의 몸뚱아리를 갈망하며 저기, 저 너머로 마구마구 달음질친다. 여기의 몸뚱아리는 여지없이 파편화되어 흩어지고 만다. 몸뚱아리가 없는, 실체가 없는 우리의 마음은 제집을 찾지 못한 채 허황되이 떠돌고만 있다. 삶은 지독히도 현실적이나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한 채 또 다른 삶이 있는양 저 자신을 속이고 파괴하는 이들, 요한 2서는 그들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 부른다.(7절)
지금을 살아내는 건, 실은 사랑의 일이기도 하다.(6절) 사랑은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원치 않는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는 지금의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게 사랑이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다. 요한 2서는 이런 사랑을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살아낼 것을 바라고 있다.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사랑을 살기바라는 요한 2서는 또다시 사랑이 살덩이가 되길 가르친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사랑의 계명이 ‘자녀들’의 삶 안에서 확연히 드러나 길 바란다. 그 옛날 예수라는 청년의 살덩이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자녀들’의 살덩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숨이 멎을 듯 가슴 벅찬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 예수는 또다시 여전히 우리 안에 육화한다고, 그리하여 우린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간다고(9절), 우리가 그렇게 믿고 살아가길 요한 2서는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처음부터 지녀왔던 사랑은(5절) 새롭지 않다. 지녀왔던 사랑은 이미, 그리고 여전히 사랑을 사는 이들을 통해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 그 자체로 육화한다. 그 단순함이 무섭고 두렵다. 너무 단단하고 묵직하다. 호들갑 떨지 않고, 부산하지 않으며, 직선적이고 과감해서 호흡이 멈추고 생각이 멈춘다. 그리고 우린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8절)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을 경외심으로 마주하며 지금, 여기 내 고단한 일상을 파고드는 또 다른 사랑을 겸허히 살아내게 된다. 짧디 짧은 13개의 구절은 말과 글 너머, 수많은 사랑을 살아내는 이들(13절)의 삶을 담아내는 길고 긴 장편소설의 습작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수많은 사랑 이 야기가 있으므로. 그 사랑 이야기 안에 수많은 신앙인이 예수로 육화할 예정이므로.
[월간빛, 2021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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