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 주님 공현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신문 2022-01-02 [제3276호, 15면]
숱한 적대자들의 표적이 됐음에도 육신을 남김없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꿋꿋이 당신의 길 걸어가신 예수님 주님 얼굴 뵙는 영광에 찬미드리길
주님 공현 대축일을 과거에는 삼왕내조(三王來朝) 축일이라 했습니다. 독특한 차림의 동방 박사들, 혹은 삼왕(三王)들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화려하고 독특한 옷차림의 이방인이다 보니 유다인들의 이목이 온통 그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랬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에게 있어 ‘삼왕내조’ 사건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려면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찾아왔으면 좋으련만, 저리 드러내놓고 요란을 떨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시기 질투의 화신인 헤로데가 살기등등하고 서슬 푸른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인류 사업은 아직 개시도 못한 상태였으니, 아직은 조용히 그리고 은밀히 기다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헤로데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심기가 편할 리 만무했습니다.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비록 로마제국에 속한 한 속국의 임금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유다 임금이었기에 화가 벼락같이 났을 것입니다. “어쭈, 이것들 봐라. 유다인의 왕이 여기 엄연히 살아있는데, 어디 감히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났다고 그래?” 이런 헤로데의 분노는 곧이어 어린 아기들의 대학살로 이어집니다. 다행히 아기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난가심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탄생 순간부터 숱한 적대자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은 생애 내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절벽 길을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일 한 가지는 그러한 반대나 위협이 이방인이나 적군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동족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도 나름 잘 배웠다는 사람들, 유다 정통 신앙을 꿰고 있던 사람들,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잘 인도할 책무를 진 지도층 인사들, 결국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가장 앞장서서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상되는 갖은 위험과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해맑고 빛나는 옥체,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한없이 나약한 육신을 세상 만천하에 남김없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죄인들인 우리 인간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낱낱이 보여주신 은혜로운 대 사건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우리 인간의 오랜 염원이었던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일, 곧 지복직관(至福直觀)을 120% 충족시켜주신 사랑의 현장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선물에 담긴 깊은 의미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이 왜 하필 황금, 유향, 몰약이었을까요? 이왕이면 갓난아기에게 당장 필요한 일회용 기저귀나 분유, 장난감이 아니었을까요?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 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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