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 방법론 1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
첫 시간은 바오로 서간을 읽는 방법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근래 성경 연구의 가장 큰 이슈는 ‘독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실재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실제 공동체에 전해져 읽혔을 것입니다. 현대 성경 해석학은 이러한 역사적 실재 독자와 다른, 바오로의 편지 내에 존재하는 독자를 발견했습니다. 이를 ‘이상적’(혹은 ‘내적’, ‘함축적’) 독자라 일컫는데, 바오로가 편지를 쓰며 염두에 둔 독자의 모습을 지칭합니다. 가령, 연애편지를 쓴다고 가정해봅시다. 필자는 관심 있는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필자는 편지를 받아 읽는 이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읽어 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의도했던 이미지가 바로 ‘이상적’ 독자입니다. 이것은 편지의 실제 수신자와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아 읽는 이는 필자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바오로 연구학자들은 ‘이상적’ 독자와 ‘실제’ 독자를 구분해야 하며, 갈라티아서를 ‘이상적’ 독자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편지가 쓰여질 무렵 신앙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편지였던 것을 감안하면, 바오로는 분명 ‘이상적’ 독자를 염두에 두며 편지를 정성껏 작성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에 입각하여 갈라티아서를 읽을 것입니다.
‘이상적’ 독자 입장에서 갈라티아서를 읽는다고 해서 ‘실제’ 독자, 즉 갈라티아 공동체의 상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는 바오로의 문학적 창작물이 아닌 실재했던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그러기에 갈라티아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은 또한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입니다. 다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주된 사안은 방법론입니다. 과거의 성경 연구는 갈라티아서에 등장하는 몇 단어(예 : 할례와 육 등)에만 치중하여 역사적 상황을 추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 그 자체의 메시지가 보다 충실히 읽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표현들이 서간 내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티아서는 당시 신앙 공동체의 문제점을 묘사하기보다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상적’ 독자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갈라티아인들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바오로의 논증 방법을 살펴본 후, 갈라티아 공동체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3) 방법론 2
지난 시간에 언급한 ‘이상적’ 독자 이론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기능’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독자를 생각하며 특별한 표현을 서간에 담았습니다. 각 표현마다 바오로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서간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가령, ‘바보야!’라는 표현을 어떤 이는 어리석고 못난 친구에게, 또 어떤 이는 사랑에 빠져 있는 친구에게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친구의 무지(無知)를 깨우치는 것이라면, 후자는 평소와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같은 표현도 그 기능을 알 때 메시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갈라티아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표현이 지닌 기능을 살펴봐야 합니다. 기존 바오로 연구학자들도 서간의 기능적 측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아 율법 준수의 삶을 받아들이려는 갈라티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이기에 갈라티아서는 교육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갈라티아 공동체를 어떤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입니다. 사실, 갈라티아서를 보면 긍정적 명령 형태(설득형)와 부정적 명령 형태(만류형)가 번갈아 사용되고 있습니다(5,1.13.16 참조). 바오로가 사용하는 명령형 동사가 단순히 가르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갈라티아인들을 만류, 설득하며 새로운 앎으로 이끌고 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간 각 부분이 독자에게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둘째, 오늘날 서간을 읽는 우리 모두가 ‘능동적 독서’에 초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상적’ 독자 입장에서 서간을 읽는다는 것이, 혹여 지금 우리의 신앙 생활과 무관하지 않나 싶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서간의 메시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상적 독자 입장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서간을 읽을 것이 아니라 바오로가 독자에게 바라는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얻게 된 시간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삶의 자리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 독자에게도 다양한 해석으로 풍요로운 신앙의 결실을 맺게 해 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간을 읽는 과정은 자신을 ‘이상적’ 독자 입장에 위치시키는 것에서 출발하며, 독서 중 발견한 메시지를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202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4) 방법론 3
바오로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사학(修辭學)에 대한 선이해도 필요합니다. 수사학이란 사람을 설득시키는 기술에 관한 학문으로서 그리스 로마 시대 학생들의 필수 과목 중 하나였습니다. 서간을 읽다 보면 바오로도 이 설득의 기술을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번 시간에는 바오로가 사용한 수사학적 방법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첫째, 바오로는 주제 제안(propositio)과 논증(probatio) 구조로 편지를 썼습니다. 두괄식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은 읽기 쉽습니다. 두괄식 문단이란 주장하는 말을 문단 앞쪽에 두는 구조입니다. 독자는 첫 문장을 읽음으로써 문단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게 됩니다. 바오로도 편지를 쓸 때 두괄식으로 표현하였고, 이를 ‘주제 제안’이라고 말합니다. 즉, 주제 제안은 핵심 내용이며, ‘논증’은 그 주제 제안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독자는 바오로의 이러한 논증적인 서간을 읽어가며 주요 메시지를 파악합니다. 따라서 바오로 서간을 읽을 때 어느 문장이 주제 제안에 해당하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바오로는 논증을 위해 세 가지 수단, 곧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를 사용합니다. 로고스는 내용 자체의 논리, 파토스는 듣는 이의 감정, 에토스는 말하는 이의 도덕성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참조). 바오로는 자주 독자들의 이성(로고스)에 호소합니다. 공동체의 과거, 현재 삶을 바라보게 하고(갈라 3,1-5),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갈라 3,6-14; 4,21-31), 인간 삶의 기본 원리에 근거하여 편지를 씁니다(갈라 4,1-7). 이러한 내용들은 편지 내용이 지닌 논리적 측면으로서 메시지의 진실됨을 드러냅니다. 바오로가 듣는 이의 감정(파토스)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독자들을 “형제 여러분”(갈라 1,11; 3,15; 4,12 등)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에 맞게 행동하게 하는 마음을 부추깁니다. 바오로는 또한 자신의 도덕성(에토스)에도 근거해 설득합니다. 과거에 그는 율법 준수에 철저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장엄하게 고백합니다(갈라 1,14; 2,19-20). 이로 인해 독자는 바오로의 메시지에 깊은 신뢰감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어가며 이러한 수사학적 방법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021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5)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할례, 율법
갈라티아 공동체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대립법(Antithesis)이라는 수사학적 기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립법이란 두 사물을 구분하여 양립 불가능함을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가령, 호리바 마사오의 「일 잘하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은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 지어 대립시킵니다. 책을 처음 집어 든 이들이 제목을 읽고, 일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마음을 갖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책 제목에 사용된 수사법이 바로 대립법입니다. 바오로도 이러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갈라티아인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갈라 5장에서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5,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5,4). 바오로는 할례 · 율법 문제를 독자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할례와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티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할례를 통한 율법 준수의 삶이 병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3,26-29).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율법을 지키고자 합니다(4,21; 5,4). 더군다나 선동자들은 갈라티아 공동체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6,12-13). 이에 갈라티아인들은 필요함을 느껴 할례를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5,2). 할례와 율법 준수가 이미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양립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갈라티아인들의 마음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의 이러한 확신을 지적하는 데에는 할례 · 율법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이해시켜 줍니다. 바오로도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율법을 인용하고 있습니다(3,6-14; 4,21-31; 5,14 참조). 그럼에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할례를 통한 율법 준수의 삶이 병행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갈라티아인들이 외적 규정에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례와 율법만이 믿음의 삶을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따르는 믿음의 순수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할례 · 율법을 따르는 삶이 병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021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육(갈라 3,3; 5,16)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바오로는 외적 규정에 따라 살아가려는 갈라티아인들의 성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3,3);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5,16).
육(Sarx)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구절은 갈라 4,23.29입니다.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언급합니다. 한 명은 하가르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창세 16,15)이며, 다른 한 명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사악(창세 21,2-3)입니다. 바오로는 첫 번째 아들이 ‘육에 따라’ 태어났고, 두 번째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아들 이사악도 사라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이 약속의 결과, 곧 ‘하느님의 섭리’로 태어났다면, 이스마엘은 후손을 보고자 하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의도, 곧 인간적인 필요성에 의해 태어났습니다(창세 16,2 참조). 이런 의미에서 육은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갈라티아인들이 할례를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선동자들의 강요로 인해 필요하다 느꼈고(6,12), 율법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규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5,4).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바오로가 성령과 육(필요성)을 대립시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갈라티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르는 삶이 병행할 수 있다 확신했던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 자체가 믿음의 삶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 모두는 주일미사를 봉헌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고, 이러한 규정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대립시킵니다. 왜냐하면 갈라티아인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늘 또 다른 규정을 찾게 합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 말입니다(5,9). 그러면서 갈라티아인들로 하여금 믿음에 따른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외적 규정으로만 살아가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동반합니다(5,16-17). 선동자들이 갈라티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면서 그들 몸에 한 일을 자랑하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6,13).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상반됨을 주장합니다.
[2021년 11월 21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7)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육(5,13)
바오로는 육(Sarx)을 또 다른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5,13). 이 구절에서 사용된 ‘육’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13이 중요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갈라티아인들에게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게 된 이유를 ‘육의 나약함’(필자 번역)이라 말합니다(로마 6,19 참조). 갈라 5,13에서의 ‘육’도 같은 의미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 갈라티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육 때문에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율법 준수의 삶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다 보면 인간적인 나약함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바오로가 같은 단어 육(Sarx)을 하나는 인간의 나약함(5,13), 다른 하나는 필요성(5,16)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사학 기법 중 환의법(antanaclasi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자에게 특별한 효과를 내는 기법입니다. TV에서 나오는 눈 영양제 광고가 있습니다. “눈 나이 먹지 말고 000 먹자". 첫 번째 ‘먹다’는 나이 듦을, 두 번째 ‘먹다’는 입을 통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다’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영양제를 먹어야 노안(老眼)을 예방할 수 있음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도 이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같은 단어 ‘육’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인간의 나약함’과 분리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갈라티아인들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율법 준수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외적 규정에 따르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바오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인이 되어도 인간적인 나약함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따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신앙인들의 삶에 기적적인 일들을 이루십니다(3,5).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다양한 열매를 맺습니다(사랑, 기쁨, 평화 등 5,22-23). 따라서 갈라티아인들이 인간적인 나약함을 핑계로 율법 준수의 삶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5,13). 바오로는 인간의 나약함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관계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던 갈라티아인들의 확신을 지적하기 위해 같은 단어로 두 가지 다른 실재를 표현한 것입니다.
[2021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8) 갈라티아서 전체 구조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갈라티아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질문은 ‘왜 바오로가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점을 서간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입니다. 할례, 율법, 육에 대한 언급이 서간의 전반부에 없진 않습니다(“할례” - 2,4; “율법”- 2,16; “육” - 3,3). 하지만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곳은 전체 6개 장 중 서간의 후반부인 5장입니다(“여러분” 참조 - 5,2-4; 5,13.16). 이 구조를 ‘수사학적 우회(Rhetorical detour)’란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곧바로 언급하기보다는 우회하여 상대방이 부인할 수 없는 전제(Premise)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후반에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삼단논법(Syllogism)에서도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타당한 대전제를 제시하는데, 이 대전제가 확장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먼저 서간 전반부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내용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서간 후반부에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를 다룹니다.
갈라티아서는 인사말(1,1-5), 몸말(1,6-6,10), 결문(6,11-18)이라는 서간 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몸말은 다시 주제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 도입(1,6-10)은 편지를 쓴 배경과 목적을 설명합니다; 2) 첫 번째 논증(1,11-2,21)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이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 3) 두 번째 논증(3,1-4,7)은 의로움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4) 세 번째 논증(4,8-31)은 종살이와 자유인의 삶을 대립시켜 갈라티아인들이 이미 자유인의 삶을 시작했음을 깨닫게 합니다; 5) 맺음(5,1-6,10)은 할례, 율법, 육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 대해 설명합니다.
세 단계에 걸친 논증은 강조점을 복음의 기원(1,11-2,21), 믿음에 의한 의화(3,1-4,7), 의롭게 된 이의 삶(4,8-31)으로 옮겨가면서 신앙의 진리를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맺음 부분(5,1-6,10)은 이러한 신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성령에 따르는 삶과 육(필요성)에 따르는 삶이 병행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갈라티아인들의 문제(가령, 할례와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양립 가능하다는 생각)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갈라티아서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서간 수신인들이 스스로 성찰하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역동성을 지닌 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9) 인사말(갈라 1,1-5)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이번 시간부터는 갈라티아서를 면밀히 읽어가며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과 그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편지는 대개 발신자, 수신자, 인사로 시작합니다. 대부분 “00가 00에게 인사”, 혹은 “00에게 00가 보내는 인사”라는 다소 간략한 형태를 지닙니다(사도 23,26 참조).
편지 형식인 갈라티아서의 인사말(praescriptio)에서도 이러한 기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인 나 바오로가 (…)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에 인사합니다”(1,2). 흥미로운 사실은 동시대 일반 편지와 다르게 인사말이 좀 더 길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바오로는 다음 네 가지를 더 드러냅니다. 첫째, 자신의 사도직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1,1). 둘째, 갈라티아인들에게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바랍니다(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확언합니다(1,4). 넷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1,5).
바오로의 인사말은 이 서간을 읽는 독자들에게 진정한 신앙적 삶의 중심이 누구인지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은 바오로가 지닌 사도직의 뿌리이며, 그가 갈라티아인들에게 서간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1,1). 또한 바오로가 독자들에게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그들 삶에 중요한 분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1,3).
이어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심도 있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1,4). 이 구절은 초대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관해 고백하던 내용으로, 바오로가 그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마르 10,45; 1티모 2,6; 티토 2,14; 히브 5,1 참조). 갈라티아인들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이와 같은 내용을 듣고 믿음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오로가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를 기억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1,6-8 참조).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업적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1,5).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독자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당시 갈라티아인들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021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0) 도입(갈라 1,6-10)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연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주제와 목적을 언급하는데, 고전 수사학에서 이 부분을 도입(Exordium)이라 일컫습니다. 이때 연설가는 칭송이나 비난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청중으로 하여금 앞으로 다룰 내용에 집중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갈라 1,6-10은 서간 전체에서 이러한 도입 역할을 합니다. 바오로는 “복음”(1,6.7)과 “복음을 전하다”(1,7.8[x2].9)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 있음을 시사합니다. 갈라티아인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로 돌아서 버렸습나다(6절).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7절). 그래서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복음의 핵심 내용을 밝히고자 합니다.
또한 서간의 목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10절) ‘지지를 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πείθω의 원래 의미는 ‘설득하다’입니다. 선동자들은 할례를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이도록 갈라티아인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러한 선동자들의 행위는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오로는 또한 묻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갈라티아인들은 선동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할례 의식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을 저버리고 선동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6,13 참조). 선동자와 갈라티아인들이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마음이 뺏겨 있을 때,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둡니다(1,1-5 참조). 이처럼 바오로가 갈라티아서를 보낸 목적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간 자체가 바오로의 신앙 증언인 것입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에 대한 비난(8-9절)은 독자들에게 특별한 기능을 합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저주’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와 단절되어 파멸의 길에 서 있음을 표현합니다(로마 9,3 참조). 바오로의 비난은 갈라티아인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멸망의 길을 밟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더 큰 관심은 갈라티아 공동체에 있었습니다(“우리는 물론이고” - 8절). 갈라티아인들도 선동자들처럼 파멸의 길에 서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보도록 안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동자들에게 이미 설득되어 바오로가 이전에 전한 것과 다른 복음, 실재하지도 않는 복음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2021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1) 첫 번째 논증(갈라 1,11-2,21)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지금부터는 갈라티아서의 몸말 중 첫 번째 논증(1,11-2,21)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 제안(propositio) 역할을 하는 1,11-12에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이 주제 제안은 이어지는 논증(probatio) 부분인 1,13-2,21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 바오로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께 받은 계시를 통해 사도직을 행하고 있음을 밝힙니다(1,13-24). 둘째, 예루살렘 사도들도 자신의 사도직이 하느님께 기원함을 인정했다고 언급합니다(2,1-10). 셋째,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보여준 위선적인 모습을 언급하며, 자신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데에 일관되었음을 강조합니다(2,11-14). 넷째, 케파가 인정했던 복음의 핵심 내용을 밝히면서 안티오키아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합니다(2,15-21).
이처럼 바오로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신적 기원을 지녔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갈라티아인들이 복음의 내용을 신뢰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할례와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 없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5,2-4 참조). 하지만 할례와 율법은 분명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창세 17,12; 탈출 20,1-17). 따라서 갈라티아인들은 바오로의 주장이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 아닌가 점차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할례와 율법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갈라 3-4장에서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에 앞서 첫 번째 논증에서 자신의 복음이 신적 기원을 지녔음을 강조하며 갈라티아인들의 신뢰를 얻고자 합니다.
둘째, 갈라티아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스스로 성찰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에 의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1,6-7; 5,7). 바오로가 자신의 복음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선동자들의 주장이 결국 하느님에게 온 것이 아님을, 더 나아가 그러한 선동자들의 의견에 동조한 갈라티아인들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게 기원을 두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021년 12월 26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광주주보 빛고을 3면]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2) 바오로 회심과 예루살렘 첫 번째 방문(1,13-24)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이제 바오로의 첫 번째 논증(1,11-2,21)을 세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이 신적 기원을 지녔음을 이야기하기 위해(1,11-12)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회심과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1,13-24).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회심 전 바오로(13-14절); 둘째, 계시와 그 후 사건(15-17절); 셋째, 예루살렘 첫 번째 방문과 그 후 사건(18-24절).
먼저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기 전 삶이 어떠했는지 설명합니다(13-14절). 그는 과거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으며,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그 시절 바오로는 유다교에 대해 어떠한 회의(懷疑)나 신심의 변화가 없었으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그 누구보다 열심하였습니다(필리 3,5-6 참조).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과거의 바오로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그 후에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힙니다(15-17절).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아 사도로 삼기로 정하셨고, 때가 되어서는 부활하신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오로에게 계시해 주시어 다른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오로의 사도직은 분명 하느님의 계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오로가 강조하는 것은 계시 사건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오로는 계시를 받은 후 바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바오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들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은 것이 아님을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예루살렘 방문과 그 후 사건을 언급합니다(18-24절).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케파(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사실을 언급하지만 이 만남 또한 사도들로부터 복음의 내용을 배우기 위함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의도는 바오로가 사용하는 시간, 공간적 표현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가령,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다음 ‘삼 년 뒤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점, ‘보름 동안’ 머무른 점, 오로지 케파와 야고보만 만났다는 점, 예루살렘 방문 후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간 사실들입니다. 바오로는 계시를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들과 매우 사적이며 제한된 만남을 가졌기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이러한 만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2022년 1월 2일 주님 공현 대축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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