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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4.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 말씀을 마음과 행동으로 들어야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2.01.23 발행 [1647호]

 

 

 

 

우리는 ‘말을 잘 듣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다’,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다’, ‘음악을 잘 듣다’. 똑같이 ‘듣다’이지만, 각각의 ‘듣다’마다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어떤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일도 ‘듣다’이고, ‘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는 태도도 ‘듣다’이며, 남이 하는 말을 실행에 옮기는 일도 ‘듣다’입니다. 약 따위가 특정한 효험을 나타내는 모양도 ‘듣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들 중 어떤 모습으로 ‘들어야’ 할까요? 어떻게 들어야 내가 듣는 그 말이 나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야기에서는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말씀을 어떤 심정으로 듣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무렵’이라는 말로 축약된 부분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백성들 스스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참으로 열악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삶의 근본 터전인 밭과 포도밭, 집까지 저당 잡혀야 했고, 아들딸들이 종살이를 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맨손으로 삶의 모진 풍랑에 맞서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힘든 상황에도 누구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간청하는 고운 마음을 보시고, 하느님은 에즈라 사제와 레위인들의 입을 통해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십니다.

 

에즈라 사제가 율법서를 읽어주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흘린 건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욕망에 눈멀어 하느님을 멀리했던 과거의 잘못들을 깊이 뉘우쳤고, 자신들의 죄가 초래한 슬픈 결과에 괴로워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망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에즈라와 레위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주십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기준으로 그들을 단죄하여 기를 꺾기를 바라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큰 절망을 경험한 그들이 힘과 용기를 얻어 당신 뜻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말씀이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복음에서 당신의 고향 마을 나자렛의 회당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 중 ‘기쁨의 해’를 선포하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읽어주신 것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그분의 뜻이 당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알아서 실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그것을 듣는 너희 안에서 가득 채워져 완성되었다.” 여기서 ‘듣다’라는 말은 “남이 하는 말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에 옮기다”는 뜻입니다. 내가 들은 주님의 말씀이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허무하게 흘러나가지 않게 하려면, 그것이 내 안에 남아 나의 마음과 영혼을 참된 기쁨으로 가득 채워 완성에 이르게 하려면, 반드시 그 말씀이 뜻하는 바를 실행에 옮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말씀을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과 행동으로 듣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