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뼈 때리는’ 경고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2.01.30 발행 [1648호]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맡길 예(預) 자에 말씀 언(言) 자를 써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대신 전함’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또한 ‘예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를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에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더해진 합성어인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구를 위하여 말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즉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듣기 불편한 말일지라도 전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소명이었습니다. 특히 모두가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느라 힘든 시기에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닥칠 거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엔 동족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암울한 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이방인들에게는 조롱을, 동족들에게는 박해를 받습니다. 생의 마지막에는 이집트로 끌려가던 길에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슬프고 가혹한 소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으셔야 했던 어려움과 고통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분명하게 전하셨지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출신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결론짓고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하는 말, 배움의 끈이 짧은 이가 하는 말, 허물을 가진 이가 하는 말에는 귀를 막아버립니다. 자기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아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왜곡과 편견일 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진실하지 못할 때, 주님에 대해 아는 극히 일부분의 사실로 그분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할 때, 우리는 믿음의 내용과 목표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잿밥’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을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요구를 직접 발설하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일으켰다던데,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이나 한번 보여줘 보아라. 그러면 네가 별 볼 일 없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진짜 예언자라는 것을 믿어줄 테니….’ 정해진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면 믿어주겠다는 마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자신들의 욕심과 호기심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신다 해도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잘 아셨기에 그들 앞에서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구약의 아픈 역사를 인용하여 그들의 ‘뼈를 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고통을 겪고 있던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메시지가 이방인들을 통해 실현된 것은 그들이 그 말씀을 제대로 듣고 따랐기 때문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지요. 자신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분의 뜻을 알고도 그 뜻에 맞게 자기 삶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언제나 ‘남의 일’이 될 뿐이라고 유다인들에게, 오늘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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