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5) 복음의 진리(2,15-21)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이번에는 첫 번째 논증(1,11-2,21)의 마지막 단락(2,15-21)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이 단락은 바오로가 안티오키아에서 케파를 질책했던 내용이라는 점입니다(2,11-14 참조). 앞선 단락에서 바오로가 케파의 관점, 곧 유다인과 비유다인의 구분으로 그를 지적하고 있다면, 본 단락에서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근거로 질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둘째, 바오로는 1인칭 주어(‘우리’ 혹은 ‘나’)를 사용하여 케파의 위선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케파의 잘못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이기에 바오로는 ‘당신’(케파)의 잘못을 직접 거론하기보다는 ‘자신’(바오로)의 입장에서 케파의 위선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합니다.
먼저 바오로는 복음의 핵심 내용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2,16). 케파는 이 복음을 인정했지만(2,6-9)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두려워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오로는 그의 위선을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우선 케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2,21). 이민족들과 거리를 두는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2,17). 하지만 사람은 더 이상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으로 믿는 이들을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5,1.13). 케파가 안티오키아에서 보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의미 없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케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의 종”(2,17)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가 유다인과 비유다인의 구분을 “헐어버렸다가” 그 구분을 “다시 세우는 것”은 스스로 죄인임을 드러냅니다(2,18). 민족 및 종교적 구분으로 돌아서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민족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사하던 이전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입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케파를 죄짓게 했다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케파는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믿어 이민족과 함께 식사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케파의 위선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오로의 질책으로 분명해지는 사실은 케파의 위선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행동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반면에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며(2,19-20), 자신의 복음이 하느님께 기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1,11-12).
[2022년 1월 23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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