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에페소를 떠나 밀레토스에 이르기까지 3차 선교여행의 계속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 미틸레네(BiblePlace.com)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소동이 가라앉자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까지 갑니다(사도 20,1-2).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난 것은 단지 위험을 피해서가 아니라 사전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을 때 코린토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로 가서 코린토 신자들과 함께 겨울을 날 것이라고 밝히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부탁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1코린 16,1-9 참조).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육로로 트로아스까지 가서 배를 타고 필리피로 건너가 테살로니카, 베로이아를 거쳐 그리스로 갔을 것입니다. 이 도시들은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들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도시들을 거쳐 가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목적지인 그리스, 곧 코린토에 도착해 석 달을 보냅니다(사도 20,2-3). 학자들은 이 기간에 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을 썼다고 봅니다.
- 트로아스 유적과 에게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정
코린토에서 겨울을 난 바오로는 배를 타고 시리아에 가려고 했지만, 유다인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을 알아채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가기로 합니다(사도 20,3). 사도행전은 ‘시리아’라고 표현했지만, 바오로가 가려고 한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갈라티아 교회뿐 아니라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곧 코린토의 신자들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금을 했고 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로마 15,25-27; 1코린 16,1-4 참조). 이 여정에 각 교회에서 뽑힌 이들이 동행합니다. 베로이아 사람 소파테르, 테살로니카 사람 아리스타르코스와 세쿤두스, 데르베 사람 가이오스, 티모테오, 아시아 사람 티키코스와 트로피모스 등입니다(사도 20,3-4).
이들은 먼저 트로아스에 가서 바오로를 기다렸고, 바오로는 필리피에서 좀 더 머무른 다음 트로아스에 도착해 일행과 합류해 일주일을 지냅니다. 바오로는 주간 첫날에 트로아스 신자들과 성찬례를 거행하고 삼 층에서 떨어진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를 살린 후 트로아스를 떠나 아쏘스로 향합니다. 무슨 생각인지 바오로는 일행과 헤어져 혼자 육로를 택하고 일행은 배편으로 먼저 아쏘스에 도착해 바오로를 기다리기로 합니다(사도 20,5-13). 아쏘스는 트로아스에서 남쪽으로 30㎞ 남짓 떨어진 항구도시로, 남쪽에서 북쪽 트로아스로 올라가거나 반대로 트로아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배들이 많이 이용하던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아쏘스에서 일행과 합류해 배를 탄 바오로는 레스보스섬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미틸레네로 갑니다(사도 20,14). 레스보스섬 북단은 아쏘스에서 1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섬 동부에 있는 미틸레네는 70㎞ 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미틸레네에서 하룻밤을 지낸 바오로 일행은 이튿날 그곳을 떠나 키오스섬 앞바다에 이르렀고 다음 날 사모스섬에 들렀다가 그다음 날에는 밀레토스에 다다랐습니다(사도 20,15). 미틸레네에서 키오스섬까지는 100㎞가 넘어 바오로가 탄 배는 키오스섬에서 쉬었다가 출발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키오스섬 앞바다에 이르렀다”라는 사도행전의 표현으로 보아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항구나 해변이 아니라 섬 앞바다에 정박해 하룻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 키오스섬(좌), 사모스섬(우)
키오스섬에서 사모스섬까지는 130㎞가 넘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아시아 속주의 주도이자 바오로가 3년 동안 머물며 온갖 일을 겪은 항구도시 에페소가 있습니다(지도 참조).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므로 1, 2차 선교여행 때를 생각하면 바오로가 에페소에 들르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에페소에 들르지 않고 사모스섬에 들렀다가 그다음 날 밀레토스로 갔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로 바오로가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에페소를 그냥 지나치기로 했고 되도록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에 있으려고 서둘렀다고 전합니다(사도 20,16). 사실 바오로는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갖고 가는 중이었기에 도중에 지체하지 않을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3년이나 머물면서 그토록 공을 들여 복음을 전한 에페소에 들르지 않고 지나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에페소에서 자기로 인해 큰 소동이 벌어진데다가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까지 겪었기에 바오로는 에페소에 들렀다가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에페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모스섬까지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모스섬에 들렀다가”라는 사도행전의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바오로는 사모스섬에서는 키오스섬 앞바다에서처럼 배에서 머물지 않고 섬에 내려 하룻밤을 보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증거는 없으나 사모스섬에는 바오로가 말씀을 전해 신자들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모스섬에서 밀레토스까지는 30㎞ 남짓 되는 거리여서 밀레토스에 가기 위해 사모스섬에서 아침 일찍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바오로가 사모스섬에서 말씀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음이 이오니아 문명의 중심을 관통하다 - 유쾌한 억측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가 일행과 합류한 아쏘스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 모은 밀레토스(사도 20,17)를 제외하면, 사도행전은 미틸레네, 키오스, 사모스 어디에서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했다거나 또는 신자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명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도행전 저자가 이 지역의 지리에 밝아서 또는 꼼꼼한 여행 기록자여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날의 아쏘스 항구
다른 측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명들이 언급된 이 일대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하나인 이오니아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실제로 미틸레네에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들인 알케우스와 사포,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같은 철학자들이 활동했습니다. 키오스는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의 저자로 알려진 시인 호메로스의 고향으로 전해지고 있고, 사모스는 에피쿠로스를 비롯해 수학자 피타고라스, 이솝 우화를 쓴 이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수학자 탈레스를 비롯해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은 어떨까요. 사도행전이 이 지명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통해 복음이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순전히 억측입니다만,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의하든 하지 않던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한 억측이겠지요?
어쨌거나 에페소를 거치지 않고 밀레토스까지 내려온 바오로는 에페소를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워서였는지 사람을 보내어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합니다(사도 20,17).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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