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순 시인 / 햇빛 미사 무덤 밖 파란 잔디 위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머리 속까지 뻗어오는 풀뿌리 한 줄기 빛이 내 몸에 닿을 수만 있다면 동맥 속은 무색 투명한 피로 풀려 심장은 발딱거리기 시작하고 온몸엔 따뜻한 기운이 돌아올 텐데 나는 여전히 몸을 잔뜩 옹송거리고 저 건너 겨울 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나를 큰소리로 불러볼까? 그냥 모르는 척 할까? 이쪽 길로 건너오겠어요? 이곳은 봄인데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잠자리를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낯선 사람 ‘나와 나’ 내 안에서도 우리는 타인이다 햇살이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목이 터지도록 노래 부르고 싶은 시간. 노명순 시인 / 눈부신 봄날 눈부신 봄날에 눈물 범벅 꽃 범벅 꽃 피면 환하다가 꽃 지면 깜깜하다 이렇게 한 세상 가는구나 봄날이 가는구나 어머니 숨 거두기 전 마지막 봄 보여 드리려고 풋솜처럼 가벼운 몸을 포대기 둘러 들쳐 업은 동네 골목 눈부시게 봄날이 간다 눈부신 봄날이 가는구나. 노명순 시인 / 일출 어머니는 만삭이 되어 어두운 새벽의 동쪽 방 창호지 문 앞에 길게 누워 몸을 뒤채이신다 어머니는 넓은 바다를 헤엄치시나 보다 파도를 넘고 넘어 험한 산에 다 달아 숨을 몰아쉬시나 보다 다시 가쁜 숨으로 거칠은 골짜기를 지나 깊은 계곡에 빠져 허우적대다 있는 힘을 다해 언덕으로 올라 오시나보다 부풀은 연회색 차마 자락에 여명이 들썩인다 어머니 어두운 창호지 문을 확 ! 열어 버린다 핏덩이 아이를 문 밖 하늘로 쏘아 올려놓는다 으앙 ! 막 태어난 아이의 빨강 몸집 눈 깜짝 할 사이에 커지는 눈부신 빛 어머니의 은빛 땀방울이 천지 사방에 이슬로 떨어진다. 노명순 시인 / 꿈의 저자거리 꿈이 많은 사람일수록 꿈주식회사에게 갚아야 할 부채가 많다 슬픔의 위험수위가 넘치는 집에 사는 사람일수록 울적한 충동구매로 꿈의 카드를 많이 사용한다 온 집안이 물에 잠겨 꿈을 쌓아 놓을 곳도 없는데 마구 사들인 꿈들이 몸을 펴지도 못하고 옷장 속이며 부엌 찬장 속이며 책꽂이 사이에 끼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쩌다 햇빛이 드는 날 젖은 꿈들을 말리려고 꺼내보면 날개 죽지가 부러진 놈, 심장 한 쪽이 떨어진 놈, 다리가 절뚝이는 놈,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형상들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꿈 주식회사에서 재촉하는 밀린 꿈값의 독촉장이다 “꿈 결제 대금이 밀려 있는 당신을 고발합니다. 곧 꿈꿀 자격 정지처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노명순 시인 / 희망을 분석하다 무슨 질감과 솜씨로 의상을 해 입었기에 속살 겹겹이 무늬져 오로라 환하게 뜰까? 흘린 듯 따라 붙는다 옷자락을 만져본다 새벽시간 한 컵에 천 조각을 담구었다 컵 속에서 발그레 일출이 떠 올랐다 해산의 고통을 치르고 빛으로 짜여진 비단 100% 노명순 시인 / 민들레·1 어머니가 달아주던 본바닥의 금색 단추가 보일 때까지 녹을 문질러 벗겨낸다, 빛이난다 깨끗이 닦은 새단추를 하나씩 풀을 때마다 진보라빛 제비꽃도, 흰냉이꽃도, 씀바귀도 다투어 튀어나와 나즈막하게 혼자만의 빛깔을 피우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제몸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무게와 구조로 꽃술도 달고 꿀샘도 채우고 씨방까지 요밀조밀 마련한다 공장의 모래가 쌓인 시멘트 벽 아래에도 민들레가 봄단추를 죄 풀어 놓고 노랗게 피어 있다 노명순 시인 / 서천 누군가 빨간 수박 반쪽을 먹다가 서산 골짜기 위에 걸쳐 놓았다 참 달디 달게 생겼다 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아삭아삭 단물 흘리며 마저 먹어 버리려고 손을 뻗어 수박을 집으려고 하는 순간 어두운 하늘이 나보다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린다 먹으며 흘린 수박물만 서산 위에 붉게 번져 젖는가 했더니 곧 말라 버린다, 깜깜한 어둠이다 더욱 목이 탄다. 노명순 시인 / 입춘 초록배낭을 짊어진 한 사나이가 아지랑이표 담배를 물고 햇살 당겨 불을 붙이며 하얀 눈이 희끗희끗한 산 중턱에 걸터 앉는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영 시인 / 사랑 외 1편 (0) | 2022.10.08 |
---|---|
이영란 시인(김제) / 데칼코마니 외 6편 (0) | 2022.10.08 |
김추인 시인 / TO Homo sapiens (0) | 2022.10.08 |
안차애 시인 / 손가락들 외 1편 (0) | 2022.10.08 |
이경교 시인 / 붉은 책 외 2편 (0) | 202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