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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애 시인 / 날마다 기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18.

고정애 시인 / 날마다 기적

 

 

3초 2초 1초

곧장 레이스로 나아간다

 

총 길이 약 9만 킬로미터

달까지 거리의 4분의 1 거리를

1분에 세 번, 서로가 뒤질세라

굽이굽이 빈틈없이 내달리는

 

핏줄 속 피톨이다

 

살고 있는 한

하루 4320회, 연 157만 6800회

우주여행 순환선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붉은피톨과 흰피톨

 

날마다 기적이다

 

 


 

 

고정애 시인 / 황금 레시피

 

 

새콤한 식초 달콤한 설탕

짭짤한 소금 칼칼한 고추냉이

 

저마다 맛을 지닌 재료들이

알맞은 양으로 어울리면

입맛 돋아주는 요리가 됩니다

 

백인백색

각기 다른 소망과 취향을 갖는

새콤달콤 짭짤하고 칼칼한

개성들이 어울려

희한하게 즐겁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듭니다.

 

 


 

 

고정애 시인 / 발본색원

 

 

루벤스의 그림

<유아 대학살>을 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진 아기들

새파란 낯빛으로 울부짖는 어미들

 

기원전 4세기 유태의 왕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

정밀 묘사한 지옥도,

옛 왕조시대 삼족을 멸했던 참상을 떠올리다가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

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씌워 여지없이

호미로 꼬챙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손을 본다

 

 


 

 

고정애 시인 / 손자병법

 

 

엘크가 뛴다

바짝 뒤쫓는 두 늑대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드넓은 들판

군데군데 물웅덩이

물보라 자욱이 일으키며 일직선으로

목숨 걸고 내딛는 그들

 

덤불 속에서

새까만 눈망울 또랑또랑 굴리며

목을 빼고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그들에게서 멀리 더 멀리

추격을 따돌리는 어미 엘크

 

 


 

고정애(高貞愛) 시인

전남 목포에서 출생. 목포여고 졸업(제1회), 연세대 번역작가 일어과정 수료. 『시와 의식』을 통해 문단 데뷔. 일본 계간 시지 『ゆすりか』 동인. 시집; 『사랑 에너지』 『연필깎기』 『튼튼한 집』 등. 『한국시 35인선』 등 일본어로 번역 출간. <시아카데미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2011년 제3회 바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