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림 시인 / 산이 크게 우니까 희다
아득히 멀고 먼 곳에서의 계시처럼 눈이 내렸다 깊고 적막한 밤의 골짝 골짝마다 눈은 제 몸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윽고 산이 크게 울었다 산의 수만 개 울음보가 한꺼번에 터졌다 아니다, 품으면 품을수록 제 몸의 온기에 녹아서 짧게 사라져버리는 눈, 그 헛것들을 끌어안으려고 이 적막 속 살아있는 뭇것들이 몰려나와 발버둥치고 있었다 마구마구 괴성을 내질렀다 숨 가쁘게 숨 막히게 질주하던, 초조와 불안이 내통하여 마침내 폭발하는 소리, 떼서리로 울어 젖히다가 떼서리로 울음 그치는 산, 울음이 커져 갈수록 산빛은 더욱 희어졌다.
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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