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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영대 시인 / 여수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5.

진영대 시인 / 여수에서

-김성오 시인에게

 

 

바다로 갔다

집을 떠날 때의 가벼움이

소금물에 절어 무거워질 때

하얀 소금꽃 필 때

바다까지 한 배낭 짊어지고

여수 밤바다에 도착하였다

파도칠 때마다

배낭 가득 짊어진 바다가 출렁거렸다

 

짐을 풀어놓고 창문을 열면

세상 다 파도인데,

열세 살에 가출해서

배낭 속에 늘

바다를 짊어지고 살던 너에게

파도 아닌 곳 있었을까

 

집을 떠날 때의 가벼움도

울컥, 파도 한번이면

온몸 소금꽃이 피는데

소금물에 절어 목선처럼 무거운데

늘 파도인 너는 어느덧

소금덩어리가 되지 않았을까

한 삼 년 소낙비면

고 소금덩어리 다 흘러내릴까

 

여수역 근처

여인숙같은 집으로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진영대 시인 / 술병처럼 서 있다

 

 

주방 모퉁이, 싱크대 옆에

늘 있었던 것처럼 술병이 하나 서 있다.

평소 술을 못 마시던 어머니 제사상에

초헌하고 아헌, 종헌하고도

첨작까지 하고도 반 이상 남은 채로

술병이 하나 서 있다.

밀봉의 마개 한번 열린 후로

술병은 쓰러질 수 없다.

굴러다닐 수 없다.

남은 대로 서서히 김이 빠지면

식구들은 슬쩍슬쩍 술에 취한다.

아내나 아버지나 그리고 나는

한 잔의 음복술도 마시지 못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술에 취한다.

술병이 비고 쓰러질 때까지

아내도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술병처럼 서 있다

 

-동인시집 『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

 

 


 

진영대 시인

세종시 출생. 한밭대학교 전기학과를 졸업, 1997년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 <길고양이도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