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문 시인 / 과수원
내가 만난 과수원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다. 그 봄에 탱자나무는 파란 새순을 탱자나무 가시 사이에서 일으켰다. 탱자나무꽃이 지면 벌과 나비가 사라졌다. 울타리 곁에는 작은 탱자들이 송송 영글기 시작했다. 내가 통과할 수 있는 과수원의 비밀통로는 없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에서 본 과수원은 호기심 속에서 신비에 쌓여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살아갈까? 오랫동안 몰랐다.
그 시절 과수원은 내게 오만으로 토라진 거대한 미지였다. 오만은 버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내 마음 속 과수원 문은 어느 가을날 노란 탱자가 떨어져 수북하게 울타리 아래에 쌓였을 때 열렸다. 나의 방문은 싱겁게도 과수원지기의 허락으로 이루어졌다. 과수원은 넓었다. 과수원 안에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한 바퀴 돌다 보면 해는 서쪽으로 한 뼘 이상 흘러가 있었다. 중세의 수도원처럼 작은 두 개의 문은 남북으로 있었다. 문을 두드려볼 걸 그랬다. 과수원을 동경할 때는 과수원에 가면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참새떼들이 탱자나무 울타리 곁을 잉크가 물속으로 번지듯 날아다녔다. 그 곁에서 나는 울타리 속을 거닐면서 어울릴만한 친구가 생기면 얼마나 신이 날까, 기대에 찬 궁금증을 품었다. 어린 그리움으로 몸과 마음이 붉었다. 시간은 생각의 늪에 푸른 잎을 입혔다. 구하면 나타나듯 친구는 어느 날 환상을 벗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과수원지기의 아내가 죽었다. 오랜 투병 끝에 죽은 여자라고 했다. 그 때 기억 속에는 왜 과수원의 실과는 보이지 않았을까? 기억의 시선은 온통 돌담벼락이 탱자나무 울타리와 마주한 곳에 쌓인 링거병에 멈춰 있었다. 그 풍경은 아릿한 밤꽃 냄새같이 적응하기 힘든 후각으로 다가왔다. 과수원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기도 했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은 죽으며, 죽음은 차갑다는 것. 까마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 뒤에 오는 정적에 쌓인 오후에는 불현듯이 공포가 밀려올 때도 있다는 것. 비둘기 소리와 꿩의 퍼덕이는 날개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안심시킨다는 것. 죽음의 냄새를 맡은 이후에 나는 한동안 과수원을 방문할 수 없었다.
하루는 마당에 비둘기가 떨어졌다. 비둘기는 우물가로 세숫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시더니 정신을 차리고 한참만에 날아갔다. 비둘기는 과수원지기가 놓아둔 새잡이 약을 먹은 모양이었다. 과수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날짐승이라도 성벽 앞에서는 예외란 없는 것 같았다. 그건 과수원이 가질 수 있는 생존의 최소형식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신의 경계를 결정하지 않으면 종종 혼돈 속으로 빠지듯이 과수원도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외부자의 침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종종 개들이 개구멍을 내어 과수원을 들락거렸지만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과수원은 나에게 비둘기나 개가 느끼는 성채가 아니었다. 과수원을 거닐며 자라난 풀을 보았다. 풀은 뽑혀 퇴비가 되었다. 풀 뽑힌 곳에는 콩밭과 땅콩밭이 생겼다. 콩의 연두색 싹이 날짐승의 먹이로 쪼이곤 했다. 빗물을 받을 콘크리트로 만든 웅덩이가 있었다. 우물과 양수기도 있었다. 아릿한 풍경이었다. 과수원 서쪽에는 오래된 성터 같은 돌무더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친구가 된 과수원집 아들과 자주 놀았다. 현실은 소설처럼 또래의 소녀를 때맞춰 보내주지는 않았다. 역시 실재는 동화가 아니다.
과수원은 누구를 키우는가? 사과나무는 끝없는 가지치기를 통해 사과를 생산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양계장 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벌과 나비가 없는 철이면 사과나무꽃은 수분을 사람의 손길에 맡겼다. 규정지어진다는 것. 그 숨소리는 자연의 사과나무였지만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얀 사과나무꽃이 눈부시게 핀 봄이면 사과꽃향기가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고, 우리 집 담을 넘어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 향기를 맡은 지 몇 해가 지나고 과수원집 친구는 나이가 들고 나도 나이가 들었다.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다. 과수원지기는 이사를 갔다. 늦은 가을이었다. 과수원은 도시계발 구획정리 속에서 들어갔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났다. 사과나무는 더 이상 굵은 사과를 맺지 않았다. 작고 볼품없고 찌그러진 열매만 맺었다. 사과나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풍요를 상실했다. 일종의 불행이었다. 나는 떨어진 사과를 밟으며 가을 과수원길을 산책하며 고독을 탐닉했다. 발밑에서 씁쓸한 사과의 단내가 났다. 단내로 코가 아렸다.
과수원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어서 노동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수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 과수원을 만나면, 과일은 사람의 노동이 낳은 땀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자신의 과수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 가꾸어야 할 열매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연은 때로 불공평한 듯하지만 최소한 자연스럽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생명은 어지러운 듯하지만 자체로 진실하다. 내가 과수원을 떠났을 때 과수원의 울타리도, 그 울타리가 지킨 사과나무들도, 그 사과나무를 돌보던 과수원지기의 집도 사라졌다. 그 위에 길이 나고 새 집들이 들어섰다. 과수원은 기억 속에서만 본 모습을 지켰다. 나는 씁쓸하고 단내가 나는 사과 썩는 과수원 흙길을 오랫동안 걸은 적이 있다.
최동문 시인 / 길 위의 여행가
길을 떠나면 내가 움직인다. 같은 시간에 길도 움직인다. 길을 떠나는 행동은 나를 확인시키는 기제다. 가끔 죽음을 만날 때 더욱 그렇다. 국도를 걸으면서 길에서 납작하게 말라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를 만날 때가 그렇다. 안락하지 않은 혼자만의 여행은 자아에 대한 질문 그 자체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 그 의미는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로 가느냐?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행을 환기시키는 쉽지 않은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두 발로 걸어 나가는 것. 스스로 만든, 길 떠남을 외부인들은 자동차로 소외시키곤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다. 혼자는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경험으로 족하다. 혹 너를 만나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거냐고 묻고 답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행을 넘어, 사람이 길지 않은 길을 가는 나그네라는 걸 깨닫는다. 너를 만나 같은 방향이면 같이 걷는다. 혼자 걷는 여행은 규칙을 따로 두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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