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리 시인 / COPY
너무 오래 켜져 있었나 봅니다 눈 밑이 꺼멓게 변해가고 있어요
이미 익어버린 생각과 굽고 있는 자막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었는데,
산더미같이 쌓인 뿌리를 들춰보면 나와 당신에게 길들여진 어둠이 결국 서로를 굽고 있더군요
장딴지에서 퍼런 실지렁이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와요
숨통을 조여 오는 브래지어 호크를 열어젖히고 업무에 지친 몸은 복사기 아래 곧게 누이세요
구워낸 글자들이 자꾸 떠오른다고요 눈 질끈 감고 외면하십시오
어디가 가장 불편합니까? 그럼 제일 무거운 희망부터 벗어 던지세요
헛된 기대도 중독의 일종 다만, 그뿐입니다
자, 이제 지긋지긋한 불빛을 한 번 더 쏘아줄게요
천정에서 시커먼 비가 새긴 하지만 침대는 여전히 포근해요
구름을 베고 누우면 꿈은 이미 시연할 준비를 끝마쳤답니다 머나먼 아이슬랜드로 날아갈 일만 남았군요
이제부터 당신은 긴 휴식입니다
『현대시』 2022.06
김사리 시인 / 바이올렛
보라는 궁전 보라는 침대 보라는 수면 아래 잠긴 꿈이야
온통 보라색으로 도배할 거야 보랏빛 커튼을 치고 벽지를 바르고
보라색 전등갓, 의자, 손잡이 ......
막 구워낸 앙금 빵과 블루베리 주스를 마실 거야 제비꽃 접시 위에 놓인 석양도 함께,
보라의 세계는 구름 위를 달리는 마차 엉덩이는 덜컹거리고, 나는 보라와 안전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지 마부와 승객의 거리처럼,
그저 무덤덤하게 곁에 있어 줄래 부풀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등 뒤에서 잠시 기다려줄래
외톨이로 자라서 숙녀가 될 때까지 슬픔은 키워야 하는 여동생처럼 미숙하기만 한데,
친절하지 않아서 좋은 보라는 내 친구 보라는 애인 보라는 보라 속의 희망이야
자, 여기까지가 내가 키운 꽃다발이야 이제 나의 고백을 받아줄래
- 계간 《시사사》 2021년 가을호, 「신작특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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